법조인에 교수와 언론인까지 더하면 정치권은 사실상 지식인 독점체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양반들이다.
<유교문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법조·고시 출신 지도자>
서양의 군사문화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면, 왜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는 끝내 민주주의가 자라나지 못했을까? 그 해답은 유교문화 특유의 ‘지능과 학력에 기반(基盤)한 신분 차별(差別)’에 있다.
최초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신체에 칼자국이나 흉터가 있는 이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공동체를 지킨 이들을 시민(市民)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시킨 것이다. 중세 서양의 기사(騎士) 계급 역시 신체적 훈련과 검술 연마를 통해 형성되었다. 지능보다는 개인의 핏땀 어린 노력이 신분 상승의 열쇠였다. 물리적 역량은 후천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기에, 서양의 무사 문화에는 '누구나 노력하면 도달(到達)할 수 있다'는 잠재적 평등의 관념이 내재(內在)해 있었다.
반면 동양, 특히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교문화는 전혀 달랐다. 신분 상승의 유일한 사다리는 과거(科擧)제도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구입해 배울 수 있는 경제적 부(富)와 타고난 높은 지능(IQ)이 결합해야만 급제(及第)할 수 있었다. 타고난 지능은 단순한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IQ 100인 사람이 아무리 밤을 새운들 타고난 IQ 120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이치다.
이로 인해 유교문화권의 신분 차별은 단순한 출신 성분의 차이를 넘어 ‘능력과 지능의 절대적 차이’로 정당화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양반(兩班) 사대부(士大夫)의 눈에 글도 못 읽는 평민은, 태생(胎生)부터 하찮고 무식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평민 역시 이러한 지능적 격차 앞에서는 저항할 명분조차 찾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인간 평등과 시민에 대한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500년 묵은 유교적 엘리트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 정치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再現)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도자 대다수는 법조인 및 고시 출신이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판·검사와 변호사 출신이며, 여기에 교수와 언론인까지 더하면 정치권은 사실상 지식인 독점체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양반들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는 우월감, '나는 너희보다 머리가 좋고 잘났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과연 국민을 두려워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조선 시대 양반들이 평민을 얕잡아보듯, 현대의 법조·고시 출신 지도자들 역시 국민을 계도(啓導) 대상이나 하대(下待)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이재명 대통령도 법조인이고, 과거 두 명의 대통령도 법조인이었다. 민주주의는 잘난 영웅이나 엘리트가 국민을 계도하는 제도가 아니다. 지식과 지능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든 시민이 대등한 권리를 갖고 서로를 무서워할 줄 아는 평등의 문화다. 현대판 양반 정치의 틀을 깨트리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란 여전히 아득한 일이다.
<부연하는 글> 나는 군 생활하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많이 보았다. 비록 내가 육사를 졸업한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총을 잘 쏘는 부사관과 병사를 많이 보았다. 또한 운동도 잘하고 나보다 훨씬 체력도 우수한 부하를 많이 보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나는 군 생활 중에 내가 잘 났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차별하지 않았다. 겸손(謙遜)과 평등을 배웠다. 하지만 전역 후, 교단에 선 이후에는 나도 모르게 지식의 유무로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는 나를 발견했다. 지식 사회가 지닌 이 은밀한 오만함, 바로 이것이 조선을 망하게 한 근본 원인으로 생각한다. 지식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500년 묵은 유교적 엘리트주의의 재현(再現)
- 소월하인(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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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13, 03: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