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닷가에서 다시 아이가 되어 있다

드럼을 다시 배우기 위해 시골 도시의 구석에 있는 드럼학원으로 갔다. <놀다 간다>

오랜만에 법조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서초동의 고급 샤브샤브집이었다. 좌장인 팔십대 중반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국민훈장을 받았어요. 그동안의 봉사활동을 인정받은 것 같아요. 늙었지만 앞으로도 봉사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몸이 고목같이 바짝 말랐다. 볼이 홀쭉하고 얼굴에 검버섯이 펴 있다. 옆에 있던 칠십대 중반의 변호사가 말할 차례였다. 기름기 없는 푸석푸석한 백발이었다.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몸이 불편했다. 의자 옆에 지팡이가 보였다.

“저는 서초구청 복지센터를 맡았어요. 법 말고 복지학 박사 학위를 얻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문에서 그가 대법관 후보 물망에 오른 걸 봤었다. 그는 계속 달렸다. 내 옆에 법원장 출신의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대형로펌의 대표를 지냈다. 검고 짙은 일자눈썹에 우뚝 솟은 코가 보였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냅니까?”
내가 물었다.
“그냥 로펌에 붙어있어.”

순간 나는 멍하니 야채와 고기가 끓고 있는 냄비를 보고 있었다.

“동해 바닷가에서 뭐 하고 지내요?”

마주 앉은 내 또래의 변호사가 물었다. 판사 출신인 그는 불란서 유학을 갔다왔다. 법조계 내에서도 인재로 알려져 있다.

“매일 같이 그냥 혼자 놀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끼니 때가 되면 햇반을 물에 말아 김치볶음이랑 먹고.”

여성 종업원이 데쳐진 고기를 야채와 함께 접시에 놓아주고 있다.

“뭐 하고 놀아요?”
“어린아이같이 이것저것 놀이를 하고 지내요. 동해 바닷가 마을에 와보니까 돈이 없어도 즐겁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표정들이 뜨악했다. 내 얘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오늘은 어떻게 놀까’라고 나에게 물어본다. ‘이게 나에게 즐거움을 주나?’가 기준이다. 나의 책상 옆에는 낙원동 악기 상가에서 사 온 전자드럼이 놓여있다. 늙은 아이의 장난감이다.

중학교 이학년 때였다. 같은 동네 살고 있던 아이가 방바닥에 책들을 깔아놓고 드럼 스틱으로 치면서 가수 최희준의 팔도강산을 기가 막히게 불렀다. 반해버렸다. 그 아이에게 종암동 재래시장 낡은 건물 옥탑방에 사는 3류 악사를 소개받았다. 부러진 연탄집게를 스틱 삼아 나무판을 치면서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 밴드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룹사운드를 조직했다. 대학교 이학년까지 연주 활동을 했다.

오십여 년이 흘렀다. 서울에 올라간 길에 음악을 할 때 베이스기타를 맡았던 친구를 만났다. 볼살이 늘어지고 몸이 비대한 칠십대 중반의 노인이었다. 굵은 목소리로 노래를 참 잘 불렀다.

“나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음악을 하던 때야. 각 대학 축제 때 가서 연주해 주고 그게 끝나면 라면과 함께 소주 한잔 마셨을 때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었어.”

아련한 눈빛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너 우리가 1973년 이대 강당에서 공연할 때 첫 곡이 ‘하이웨이 스타’였고 마지막 곡이 ‘차일드 인 타임’이었어. 기억하니?”

그랬었나?

“나도 지금 다시 기타를 만지고 있어.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같이 해 보자. 다시 그때 놀던 아이로 돌아가자.”
웃는 그의 얼굴에는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래 보지 뭐”
나도 씩 웃었다.

친구 사무실을 나와 걸었다. 길가의 가로수에 봄의 연두가 풀리고 있었다. 뒤뚱거리는 나의 발걸음이 수시로 보도블록에 걸려 엇박자를 연출한다. 이런 몸으로? 그냥 꾸어보는 꿈이다.

밤 아홉 시경 지하철 2호선이었다. 파출부 일을 나갔다가 돌아가는 주부들이 손에 쥔 핸드폰 화면에 몰입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 봤다. 액정화면 안에서 테트리스의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여성은 고스톱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숨구멍인가? 가슴이 저렸다.

노는 사람들은 동해에도 있었다. 파도치는 길 바로 옆에 먼지가 가득 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구석의 선반에 과자, 라면, 캔맥주 같은 물품들이 놓여있다. 그 옆에 작은 방이 있고 책들이 쌓여 있었다. 육십대 말쯤 되는 주인 남자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는 걸 봤다.

“포구의 어부들은 만나면 물고기와 낚시 얘기만 해요. 재미없어요. 나는 평생의 취미가 그냥 혼자서 책을 읽는 거예요.”

드럼을 다시 배우기 위해 시골 도시의 구석에 있는 드럼학원으로 갔다. 드럼 선생은 원룸에서 혼자 사는 육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저는 젊어서는 평택 미군기지 통신기술자였어요. 음악을 좋아해서 어깨 너머로 기타와 드럼을 배웠죠. 늙어 동해로 와서 취미반 드럼을 가르쳐요. 그리고 기타를 들고 바닷가로 가서 버스킹을 하죠.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가수 소리새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하루에 씨디 이백 장을 판 적도 있어요.”

나는 동해 바닷가에서 다시 아이가 되어 있다. ‘프라우드 메어리’를 크게 틀어놓고 드럼을 두들기고 있다. 바닷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면서 그 앞에서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든다. 아직도 디스크자키가 있는 다방에 가서 메모지에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신청곡으로 쓴다.

디스크자키는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산 속에 와서 다방을 한다. 죽은 딸의 유골도 창 밖에 서 있는 나무 아래 묻었다. 바람에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 밖에서 뛰놀던 아이가 저녁에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밥 먹고 잠자리에 든다. 머리맡에는 낮에 가지고 놀던 딱지와 구슬이 놓여있다. 하나님이 부르면 가지고 놀던 것 다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하는 것 아닐까.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