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에 여덟은 걸면 걸리게 하는 기관이 북한정치보위부이다.
열에 여덟은 걸면 걸리게 하는 기관이 북한정치보위부이다.
오늘 낮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은 북한 완전정치범수용소에서 탈출한 첫 탈북인 김용이다. 가명이다. 1999년 12월 경 북한인권시민연합 세미나에서 처음 뵈웠다. 이사실을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기자에게 제공하여 긴 글이 월간조선에 실렸다. 네이버 검색을 해도 이 내용이 나온다.
이분을 사례로 북한정치범실태를 널리 알리기위해 가장 좋은 방법인 영화제작도 시도하였다. 실제로 미국 엘에이에서 2003년2월 헐리우드 스필버그와 신상옥 영화감독에게 영화제작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그해 4월에는 안양 신필림에서 신상옥감독과 최은희 배우를 만나 논의하기도 했다.
김용은 나와 고향이 같은 분이다. 황해북도 서흥군 출신이다. 내가 어린 시절 보냈고 아버지가 기사장을 한 일제시대 감옥소 자리인 화곡리 잠업 종축장을 아는 유일한 분이다. 출세 가도에 올라 국가정치보위부 부부장 박도하 밑에서 외화벌이 핵심간부였다. 김병하 국가정치보위부장이 숙청된 후 부장은 김정일이 도맡아 했다. 바로 밑 부부장을 12명 두었는데 가장 핵심 부부장이 재정을 맡은 박도하였다. 박도하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부관으로 오래 있었다. 평북도 출신으로 미남, 김경희는 자기에게 충성 다한 그를 오빠 김정일에게 말하여 좋은 보직을 주게 한다. 정치보위부 후방 부부장이란 핵심위치에 오르게 한 것이다. 돈 버는 실무를 전혀 모르는 그는 사업능력이 좋은 김용에게 일을 다 맡겼다고 한다.
마침 조총련에서 기부한 어선 3척으로 고기를 잡아 일본에 팔아 목돈을 김정일에게 바쳤다고 한다. 대좌라는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자 신원조회가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 아버지가 씨아이에이 요원으로 활동하다 처형된 것이 발각된다. 3살 때 고아원에 자라나서 아무 것도 모르는 바였지만 신원조회로 인하여 하루아침 체포되어 개천 정치범수용소에 가게 된다. 가장 힘든 탄광막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죄명은 정치보위부에 침투하여 체제를 전복하려는 음모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3살 때 고아원에서 자라나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지나친 것이다. 특히 국가정치보위부 박도하 부부장도 이를 안다. 자기 부하로 충실했던 그가 안쓰러워 완전정치범수용소에서 혁명화 구역으로 이전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탈출하였다. 이 탈출 기법은 공개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탈출자가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름도 본명을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고향이고 또 동생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친근하다.
이분에게 정치보위부 생리를 물었다. 왜 북한을 좋다고 찾아간 북송교포를 비롯해서 쩍하면 간첩혐의 또는 반혁명분자로 끌어가고 죽게 만드는가고 물은 것이다. 이에 이런 답을 한다. 정치보위부 입장에서 보면 지나가는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걸면 걸리게 되어 있다고 한다. 법치사회로서 이중삼중의 견제장치를 둔 남한에서도 정치몰이하는 판에 북한은 더 말할 것 없다는 것이다. 정치보위원의 실수도 처벌하긴 한다. 하지만 대체로 무마된다는 것이다. 수령과 국가를 보위하라는 기본 임무를 부여한 기관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완전정치범수용소 첫 탈북인 김용의 증언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26-08-18, 19: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