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찍은 사진들을 다 태웠어요"

"가진 것들을 하늘로 먼저 보내는 거예요. 나는 영혼만 나중에 가면 되니까." <괜찮아>

자줏빛 저녁 여운이 바다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파도들이 와글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해변 데크 위에서 옥계 심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팔십대의 심 선생은 은행에서 퇴직을 한 후 동해 바닷가 마을로 내려와 산 지 16년이 됐다. 좋은 이웃이다. 심 선생이 종이컵에 가지고 온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어제는 마당에서 내가 평생 찍은 사진들을 다 태웠어요. 책들은 마을의 노인대학에 다 기증했구요. 집안의 물건들을 다 정리해 나가고 있어요. 내가 가진 것들을 태우는 행위는 하늘로 먼저 보내는 거예요. 나는 몸도 태워버리고 영혼만 나중에 가면 되니까.”

옆에 있던 심 선생 부인이 말했다.

“우리 부부가 평생 찍은 사진을 태우는 걸 보니까 섭섭하더라구요.”

그 부부는 지난해 수술을 받았다. 핏기 없는 얼굴로 서울의 병원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작별로 생각했다. 아내가 끼어들었다.

“저도 평생 모았던 것들을 가난한 친척 아이에게 줬어요. 옥션에서 산 그림도 남을 주고요. 어려서 듣던 제니스 라디오도 남편 친구 빵집 소품으로 줬죠.”

심 선생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죽음을 자각하면 이제 남은 짧은 순간들이 그만큼 더 의미가 있고 즐겁게 살 것 같아 그러는 거죠. 우리 부부는 늙음에 대한 준비도 미리미리 했었죠. 퇴직 후 마당에 색색의 꽃이 가득한 바닷가 작은 집을 사서 지금까지 즐겁게 살았어요.”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80이 넘은 지금은 현대판 고려장 3종 세트에 걸리지 않으려고 해요. 애들이 시설 좋은 실버타운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난 넓고 화려한 수영장 필요 없어. 안 할 건데 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집에서 살다가 죽을 거야. 요새 아프면 요양원으로 보내잖아. 그건 감옥이야. 그 다음이 요양병원인데 해골이 되도록 죽지 못하고 줄을 온통 매달고 사는 거지.”

그가 활짝 웃으면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를 보았다.

“이 광경을 보세요. 파란 비단결 같은 바다, 수평선으로 지는 해, 조금 있으면 떠오를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 순간이 진짜 살아있는 거지.”

그는 준비가 빨랐다.

변호사를 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고인물 같이 나른한 봄날 오후 내 사무실 문을 열고 한 노인이 들어왔다. 대머리에 콧등이 높고 길게 뻗어 있었다. 의과대학장인 저명한 노(老)의사였다. 그가 내게 자신의 이혼소송을 의뢰하면서 말했다.

“돈과 명예가 있다고 노후가 행복한가요? 그런 거 다 소용없어요. 하루라도 따뜻하게 살고 싶어요.”

노인인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저는 가난한 의대생이었어요. 부자집 딸과 결혼했죠. 처가에서 작은 의원을 차려줬어요. 매일 번 돈을 아내에게 바쳤죠. 아내도 의사였죠. 저에게 밥 한번 따뜻하게 해 준 적이 없어요. 제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와도 역할이 식모였어요.”

그의 눈에 물기가 스몄다. 나는 잠시 침묵하면서 창밖을 보았다. 명품을 파는 삼풍백화점의 붉은 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혹독하게 춥던 겨울날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찬물로 며느리의 빨래를 하는 걸 봤어요. 가난이 죄였죠. 아내는 제가 번 돈으로 땅과 건물을 샀는데 칠십년대 부동산 경기를 타고 엄청나게 값이 올랐죠. 난 돈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려고 곁눈질하지 않고 살아왔죠. 그렇게 대학병원장이 됐어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묵묵히 바닥을 보았다. 환풍기 모터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 날 단골로 다니던 한식당에서였어요. 수더분해 보이는 주인 여자가 생선의 뼈를 발라주고 국이 식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울컥해졌어요. 따뜻했어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내 속으로 밀물져 들어왔다.

“그동안 산 건 산 게 아니었어요. 집을 나와 작은 방을 하나 얻었죠. 저녁이면 내 방으로 돌아와 빨래판에 팬티와 런닝 셔츠를 놓고 빨래 비누를 개서 문댔어요. 최고의 심장 권위자니 대학 병원장이니 하는 거 다 헛거였어요. 늙은 이제야 평안을 얻은 것 같아요.”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려서 봤던 흑백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의사인 아들이 학교를 찾아온 어머니를 외면하면서 애인인 여성에게 모르는 여자라고 했다. 순간 사무실이 진공 속 같이 적막했다. 의대생이 노인이 되어 내게 말했다.

“단칸방에서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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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浩然의生覺 2026-09-02 오전 9:40

    감명 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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