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8월 '일조(日朝)협회' <8·15 해방 15주년 경축 방북단> 일원으로 3주일간 訪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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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평양의 밤>
1960년 8월 13일 오후, <8·15해방 15주년 경축 방북단>(*이하는 방북단으로 표기한다) 24명을 태운 프로펠러 비행기 2대가 천천히 평양시 상공을 선회하더니 평양 교외에 있는 공항에 착륙했다. 북한당국이 전날 홍콩-베이징을 경유 베이징 공항까지 보내준 전용기이다. 우리는 소련제인 듯한 투박한 승용차에 나눠 탄 후 평양 호텔로 직행했고, 그곳에서 긴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이틀 후인 15일, 모란봉 아래에 위치한 김일성 광장에서 열리는 <8·15해방 15주년 기념식>에 일본인 대표로 참가해 대규모 퍼레이드를 경축하고 전쟁 참화의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 굳건함에 대해 진심으로 우러나는 존경과 축하의 인사를 나눌 그러한 일정으로 되어있었다.
이 책 끝머리를 보아도 아시겠지만, 방북단은 단장에 아베 기미코(전 참의원 의원. 사회당 일조협회 부회장)를 비롯해 모두 <일조(日朝) 협회>의 중견간부급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면면을 봐도 중, 참의원, 지방의원, 노동조합 간부, 실업가, 의사, 사진가 등 일본 내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국적 규모의 멤버들이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금방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은 일본에서 이른바 좌익계 인사들이었다. 일조협회 그 자체는 재일조선인들과 일본 사람들로서 종교, 교육, 문화, 예능 방면의 유지들이 발기인이 되어 정치와는 상관없이 양국 간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취지에서 발족한 순수한 문화단체이다. 창립 당시에는 아사쿠사 만류지(萬隆寺)의 주지인 구루마 다쿠마씨가 회장이 되고, 칸다사(神田寺)의 도모마쓰 등이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소련, 중공 등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많이 가입하면서 어느새 그들이 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의 민족교육 부활 투쟁을 계기로 차츰 좌익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회원 대부분이 탈퇴하고, 몇 년 동안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던 중 1955년 하다나카가 북한 수뇌부와 회담하고 귀국 후 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자 그해 11월 제1차 대회에서 일-조 양국의 이해와 우호를 깊이 하는 동시에 경제, 문화 교류를 도모하고 국교 정상화 촉진 및 북한식 평화 통일방안을 지지해 상호 번영과 세계평화에 공헌한다는 기본 방침을 내걸고 새롭게 발족하였다.
1958년 제4차 대회에서는 북한을 적극 지지하며 한일회담을 반대하고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강력히 추진한다는 북한 일변도의 정책을 내걸고 소위 북한 정부를 추종하는 활동을 해왔다. 더욱이 대대적인 북송 실현에 많은 공로로 하다나카 이사장은 그해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에서 국기훈장 2급까지 수여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의 <일조협회> 방북단이었던 것만큼 그 구성과 성격 등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방북단 명부에는 내 이름 세키 기세이도 들어있다.
일본인들만으로 편성된 사절단 속에 내 이름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은 줄로 아나, 별표에 나의 이력을 밝혀놓았다. 원래는 조선인으로서 오귀성인 내가 1951년 2월 구법에 의해 일본인 세키 간이치로와 양자로 결연하게 되면서 일본인 세키 기세이가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1958년 2월 이후 일조협회 오카야마현 지부 부지부장,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중앙본부 재정위원, 일중 우호협회 및 일·소협회 오카야마현 지부이사라는 자리에 취임하는 등 소위 <일본의 평화운동>에 있어서도 물심양면으로 활약해 온 경력이 있었기도 하다.
때문에 조선 사람 오귀성으로서 오매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대하는 감격과 조국의 힘찬 건설의 망치 소리를 각 분야에 걸쳐 직접 보고 들어보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평양 호텔>에 저녁노을이 비낄 무렵-나는 일본인 멤버들이 떠들썩하는 좌석을 물러나 혼자 눈 아래에 펼쳐진 평양시가를 오래도록 굽어보고 있었다. 주마등 같은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기대와 감격을 눈앞에 둔 격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16세 때, 전라남도 순천의 농업 보수 학교에서 <스트라이크>의 주모자로서 일본제국주의 주구인 고등계 형사에게 잡혀 경찰서 유치장에 처박혀 있을 때 반항하던 기억, 겨우 여비만 장만한 채 도쿄로 도망간 다음 천애의 고독한 자로서 고학이라도 하여 시험에 합격했던 일-그래도 살 길이 막막하여 유학을 단념하고 귀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18세 때의 괴로웠던 추억을 비롯하여 일본과 고향에서의 고투, 빈곤과 민족 차별에 맞서 싸워온 고난에 찬 반생 등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다른 일본인 멤버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 – 8·15 축전 참가와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들의 생활 실태조사, 그리고 장래의 참고 자료 수집 등 보다 큰 사명이 있었다. 그건 스스로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조선인 귀국협력회 오카야마현 지부 간사로서 조선인 동포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스스로 내딴엔 앞으로 북한으로 귀국해 남은 반생을 고국 땅에서 살고 싶었다.
때문에 이미 귀국한 교포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행복할까? 조국 재건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등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에 귀국자들의 일상생활이 불행하다면 앞으로 재일동포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준비를 시켜 보내줄 것인가를 먼저 간 귀국자 자신들의 입을 통해 들어봐야만 했다.
조총련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귀국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맨몸으로 가기만 하면 그날부터 의식주가 부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우고 싶은 것은 국가가 무상으로 가르치며 건강한 사람에게는 취직의 길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조총련의 말에 추호의 거짓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로서는 한 사람이라도 많이 조국에 보내고, 조국 재건에 몸 바칠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귀국자의 실정을 직접 보고 알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친구나 선배들도 이미 귀국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을 찾아보고 평양에서 만나자던 약속을 지켜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틀 후에 있었던 8·15해방 15주년 행사에서 김일성 이하 당, 정부, 외국 내빈과 함께 관람대에서 내려다본 육, 해군, 학생, 직장 대표 등의 대규모 퍼레이드는 인상적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주일에 걸쳐 황해, 개성, 원산, 청진 등 북조선 측이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직접 현실을 알게 된 후에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자기혐오와 오뇌에 빠졌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양심과 정의에 걸고 호소할 결심이 생겼는가를 이 글에서 나는 눈곱만큼도 가식 없이 털어 내놓고 싶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심한 괴로움에 휩싸여있다. 왜? 거짓 없이 펜을 잡은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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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밖 대동강변에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방문단 일행 24명은 모두 화가 났다. 8·15해방 기념식 날이 지났는데도 한 걸음도 호텔 밖에 내보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바쁜 행사 관계로 관심할 새 없어서 아니면 초행 방문자들이 사고라도 날 가 보호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러다 시일이 좀 지나면 자유롭게 거리 구경과 친지 방문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다 못해 어떤 단원은 시침 뚝 떼고 호텔 밖으로 나갔으나 뒤쫓아온 안내원에 의해 강제로 다시 끌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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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잘 아는 이들이 우리가 호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하게 쫓아낸다.
단원들은 북조선에 도움을 준 공로자들로서 그 과정 아는 이들이 평양 시내에 적지 않았다. 이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안내원에게 졸랐지만 그 사람은 다른 직장으로 이동하여 어디 있는지 모른다. 설사 있다고 해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등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답뿐이었다.
어찌 그것뿐인가. 편지를 보내려 해도 반드시 안내원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검열하기 위해서이다. 용돈을 위한 교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처사에 단원들 모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며 불평불만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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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아침만이라도 공기 좋은 대동강변에 나가 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 호텔의 베란다에서 하라고 꾸짖는다. 어처구니없다. 호텔 베란다는 서너 명이 설 수 없는 좁은 공간이다. 어떤 단원은 나를 창가로 불러 아름다운 대동강을 가리키면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낚시질했으면 아무 불만도 않겠어.> 하며 한숨을 푹 쉰다. 견학도 지정된 장소만 한다. 이때마다 불과 50m 밖 근거리에도 자유롭게 걷지 못하게 차로 움직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났을 때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금강산 갔을 때도 목욕이나 식사까지도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집단으로 하게 한다. 개별 행동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학대를 받아야 하는지 단원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불만은 쌓이고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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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행사에 초대될 만큼 우리는 북조선에 공로자로서 행사 초기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내보니 <새장>에 갇힌 신세라니 이게 뭐야?! 하는 분통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원 중에는 단순히 비즈니스로 온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이런 처우에 고분고분할 리 없다. 이런 단원 한 사람이 아베 단장이 강력이 나서 줄 것을 제의한다. 아베 단장도 선처의 건을 여러 차례 당국과 교섭한다. 하지만 그 대답은 판에 박은 듯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되풀이할 뿐이다. 위에 지시이니 안내원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갈 때 아베 단장은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단원들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자고 일정을 당긴다. 기분 나쁜 이 나라를 하루빨리 뒤로 하기로 단원 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리하여 북조선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아! 이젠 살았다! 해방감을 맛보려는 순간 돌연 변수가 생긴다. 북조선 대사관으로부터 호텔에서 외출을 금지한다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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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까지 와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드디어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단원 중에 공산당원 3명을 뽑아 밤중에 황봉구 일조협회 회장을 만나 항의했다. 일조협회 사람들도 중공 땅에까지 쫓아와서 자유를 억압하는 북조선당국을 욕했다. 베이징에서 있을 일화이다. 단원들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선생님! 선생님 하며 존대받던 사회당 의원 역시 고국에 편지를 보낼 때 화살같이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한결같이 써 보내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기분들을 나로서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귀성 著 '낙원의 꿈은 깨어지고' 요약(1)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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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11, 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