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잘 살던 정점(頂點)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한여름 쉰 닭고기가 아까워 드시고 설사병으로 돌아가신 외증조할머니. 어제 탈북자 망향제에 갔다 와서인지 피곤하여 일찍 자고 일어나니 새벽 5시 반, 일어나기 전에 또렷하신 눈으로 저를 보시던 외증조 할머니가 왜 갑자기 보일까. 어려서 나에게 할머님으로 각인된 분이다. 아버지 쪽은 남한 출신이기에 친척이 없다. 황북도 서흥군 고성리 출신인 어머니 쪽만 친척이 있다. 방학이 되면 신막읍에 살던 나는 뽀르르 외켠으로 놀러가곤 했다. 배급에 매여사는 1960년대 읍내보다 식량이 여유로운 농촌 외켠으로 보내지는 경향도 함께 했다. 외켠에 가면 가장 반가워하시는 분이 외증조 할머니였다.

대문에 들어서면 <민백(민복)이 왔냐?!> 하며 반기시던 분이다. 70대이신데도 밤나무를 타실 만큼 날렵하시고 건강하여 마을에서 소문났다. 하지만 1969년경 방학에 가니 보이지 않으신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서경자 이모가 설명하기를 설사병에 걸리셔 일어나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런 위생시설이 없는 창고같은 윗방 흙바닥 벼짚멍석 위에 누워계셨다.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하신다. 하지만 터방이 높은 방문 위로 외증조할머니를 보니 눈은 아직도 똘망하셔 저를 쳐다보신다. 반가운 눈치이시다. 하지만 옛날처럼 웃으시며 <민백이 왔냐?!>란 말은 없으시다. 냄새가 난다고 접근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10살의 어린 마음에 너무 불쌍해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할머니! 하고 다가가지 못했는지 후회스럽다. 요즘같으면 링게르 주사만 맞으셔도 살아나실 설사병이다. 방학이 끝나도록 살아 계셨는데 그 후 돌아가셨다고 했다.

왜 설사병에 걸리셨냐고 하니 마을 어느 잔치집에서라고 한다. 잔치상에 예식처럼 놓은 삶은 닭이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너무 귀하다. 식량이 빠듯한 속에 곡식을 먹고 자라는 닭이기 때문이다. 귀한 닭고기이기에 누가 먹을지 아끼다가 한여름 더위에 그만 쉬여 버려야 했다. 이것이 너무 아까워 잡수셨다고 한다. 쉰 고기는 소다를 쳐서 중화시켜야 하는데 그런 상식도 소다도 없었던 것이다. 나의 인생에 할머니로 각인된 외증조 할머님은 이렇게 음식을 잘 못 드셔 돌아가셨다. 어찌면 식량난과 연관되어 있다. 1969년은 북한이 가장 잘 살았다고 하던 절정 시대였음에도 일어난 비극이다.

어제 북한이 빤히 보이는 강화 교동도 망향제는 외 증조할머니가 계셨던 곳과 불과 100리 떨어진 곳이다. 주변을 보면 먹을 것이 넘친다. 생활 여유가 있어 관광을 한다. 이곳과 똑같은 자연환경인 바로 물 건너 북한과는 하늘과 땅처럼 대조가 된다. 제도 하나 차이가 만든 결과이다. 왜 갑자기 외증조할머니가 아침에 단잠을 깨우시며 나타나실까. 나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영원히 사라지실 분이다. 이름없는 나의 책에라도 남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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