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들, 서울의 추위를 녹이다

거기 사는 절대다수의 인간은 사육되는 짐승보다 못하다. 짐승은 잡아먹힐 때까지 뒤룩뒤룩 살이 찌도록 잘 먹기는 한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한 율법가(구약 성경 전문가)에게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나직나직 일깨워 준다(누가복음 10:30~36).

--어떤 남자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오아시스 도시) 여리고로 가다가 (인적이 드문 언덕에서 덜컥) 떼강도를 만났습니다. (괴나리봇짐도 빼앗기고) 옷까지 홀랑 벗겨 (부끄러운 데만 간신히 가리고 몽둥이찜질에 주먹질 발길질에) 반쯤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당신과 비슷한 신분의) 제사장[오늘날의 목사나 신부 또는 권력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모른 척하고 (씩씩하게) 걸어갔습니다.

(이어서 손에 흙을 묻힐 필요 없이 성경공부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전에서 예배만 드리면 되는, 역시 당신과 비슷한) 레위족[조선시대의 양반이나 북한의 노동당원 비슷한 귀족]이 한 명 지나갔습니다. 그도 (모른 척하고 무언가에 몰두한 학자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척하며 느릿느릿) 그냥 지나갔습니다.

(누군가가 도와 주지 않으면 영혼이 막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떠날 무렵에, BC 722년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하면서 아시리아인과 마구 피를 섞는 바람에 그 후손들이 혼혈족이 되어, BC 586년 바빌론에 멸망한 남부의 유대왕국에 살던 유태인을 비롯하여 전 유태인들이 700여년 동안 경멸하고 상종도 않던) 사마리아인이 한 명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 나그네를 보고는 (자기 친형제가 그런 꼴을 당한 듯이) 가슴이 찢어질 듯하여 얼른 다가가 정성껏 응급조치를 취한 후에 (옷도 입혀 주고) 당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려고 가서 (밤새도록) 돌봐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돈까지 쥐어주면서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면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서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또 들릴 테니까, 그 때 만약 준 돈이 모자라면 전액 대신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중에 누가 떼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일까요,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분이시여)?”

히틀러의 600만 유태인 학살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진영에서는 그 비극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함으로써 국가권력에 의한 무차별적인 자국민 학살은 거의 사라졌다. 신문과 방송과 전화가 거미줄처럼 연결됨에 따라 그 어떤 정보도 한 나절이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내전 상황이 아닌 한 맨몸의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보가 나머지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데는 무려 50년이 걸렸다. 마침내 드러난 대학살극!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실지로 일어났던 것이다. 정보를 철저히 차단한 철과 대나무의 장막 뒤에서 600만 학살의 10배하고도 다시 5배에 이르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지극히 추상적인 평등이란 이념을 공유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유진영에 사는 배부른 좌파들이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왜곡하고 찬양하는 바람에, 1억 희생자는 화마에 삼켜지는 풀과 나무처럼 붉은 마수에 삼켜져 50년 후에는 유골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지구상에 철의 장막보다 더한 공포의 장막을 치고 아직도 일체의 내외 정보가 완벽히 차단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그 곳이 바로 북한이다. 오로지 한 개인의 집권야욕 때문에 정보를 완벽하게 차단함으로써, 정보만 바로 공개되었으면 단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는 대명천지 20세기말에, 끝내 3백만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도 그랬고 모택동도 그랬지만, 오로지 정보차단 때문에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서 사람이 굶어 죽는데, 거기에 무슨 호사스러운 인권이란 개념이 있을 리 없다.

거기 사는 절대다수의 인간은 사육되는 짐승보다 못하다. 최소한 사육되는 짐승은 잡아먹힐 때까지 우리 속을 벗어나지 못할 뿐, 뒤룩뒤룩 살이 찌도록 잘 먹기는 한다. 그러나 ‘지상낙원’에서는 행동의 자유만이 박탈당한 게 아니고 말의 자유도 심지어 생각의 자유도 박탈당했다. 먹을 권리를 비롯하여 일체의 권리도 박탈당하고 오로지 살아있는 신을 경배할 책임과 의무를 허리가 부러지도록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 초상화가 때 묻고 비에 젖거나 구겨지는 것을, 불에 타는 것을 제 눈에 고춧가루가 뿌려지고 제 알몸에 염산이 끼얹어지거나 제 팔다리가 뚝뚝 분질러지는 것보다, 제 온몸이 유황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그 믿음을 실지 행동으로 여차하면 입증해야 ‘지상낙원’에 살 자격이 있는 훌륭한 노동자․농민 대접을 받기 때문에, 오로지 충성을 다 바쳐 강냉이 한 알이라도 더 얻어먹고 하루라도 더 살 궁리만 한다. 이런 곳에 인권이란 말이 존재할 리 없다. 오직 사교(邪敎)의 신도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살아있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쿠바가 아직까지 공산체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거기는 야구와 복싱에서 부동의 세계1위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생존권이라든지 기본적인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이 된다. 그래서 유엔의 인권결의안에서 북한은 찬성과 반대의 차이가 무려 62표나 되지만, 쿠바는 겨우 그 차이가 4표밖에 안 된다.

소련과 중공을 비롯한 공산진영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거대한 정치실험을 하던 때와는 달리, 이제 절해고도처럼 단 한 군데만이 언제까지나 정보로부터 완벽히 차단될 수 없다. 정보 차단막을 뚫고 연인원 약 100만 명이 이왕 죽을 목숨 한 끼라도 배불리 먹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그 두 강을 사이에 둔 땅의 동상이몽식 국가이익 때문에 이들은 다시 잡혀가거나 거기서 10만 년 전의 혈거인처럼 살든지 강제노역을 당하든지 성노예로 내돌리면서, 자유대한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빛 한 송이를 가슴에 품고 끈질긴 목숨을 이어간다. 이들은 단 한 명 예외 없이 아무리 따로따로 물어도 참혹한 인권유린에 대해 똑같은 증언을 한다. 진실이 아니고는 그렇게 일치할 수가 없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광기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그보다 더한 일이 북한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이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좋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떤 곳에서도 이제 그런 일은 꿈속에서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지만, 10년 이상 똑같은 증언을 듣게 되자, 이제 최소한 84개국에서 그들의 증언을 믿게 이르렀다.

오로지 한 군데, 떼강도 만난 나그네의 동족이 사는 나라만은 이를 한사코 부인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해괴한 궤변으로 왜곡한다. 여리고 가는 길목의 유태인 제사장처럼 같은 한민족 중에서 아직도 가장 지당한 말씀을 많이 하고 있는 자들이, 언제든지 영혼을 구제해 줄 듯이 큰소리치는 많은 종교가와 당장이라도 무릉도원을 세울 듯이 설치는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잠꼬대에서도 인권과 민주와 민족을 외치던 자들이 떼강도 만난 같은 민족은 본 척 만 척하고 떼강도에게 오히려 함께 손을 잡자며 괴나리봇짐의 천 배 만 배 되는 돈과 물건과 식량을 올려 보낼 뿐, 정보차단을 구실 삼아 떼강도에게 당한 동족을 한 명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떼강도와의 협상을 깨지 말라고 도리어 눈을 부라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도리어 내쫓고 비난한다. 선한 형제와 선한 사마리아인 덕분에 대한민국이란 여관에 들어온 나그네만 받고는, 100만 명 중에 남의 눈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겨우 7천 명만 받아 주고는, 온갖 생색을 다 낸다.
--아, 감격스러운 민족화해여! 분단의 치욕은 가라!

한국의 레위족들도 마찬가지이다. 학계, 방송언론계, 노조, 시민단체 등 추상적인 말로 먹고사는 자들도 떼강도 만난 동족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도 떼강도를 달래기에 급급할 뿐, 10년을 갖다 바치고도 떼강도에게 다시 잡혀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는 동족을 단 한 번 면회조차 못해 보고도,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동족을 잡아가는 일은 없지 않느냐며, 이만하면 대단한 발전이 아니냐며, 전 세계를 향해 공치사하기에 바쁘다.
--보라, 저이들은 이마에 뿔이 달리지 않았도다! 반공의 껍데기는 가라!

노르베르트 폴러첸과 수잔 솔티!
이들 두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떼강도 만난 이웃을 만나러 왔다. 여관에 부탁한 그 이웃을 만나러 왔다. 2005년 12월 4일부터 일주일 간 유독히 추운 여리고 길목에 이들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수많은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왔다. 차마 한국의 제사장과 레위족은 이들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의, 서울의 추위를 입김 한 번으로 녹여 버리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세계의 눈이 무서워서! 대신에 공기처럼 사방에 뻗친 권력을 동원하여 방송과 인터넷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하고 또 차단했다. 4천8백만의 마음속에 깊숙이 잠자는 이웃사랑의 불길이 화산처럼 솟구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위선이 폭로될까 너무도 무서워서, 한국의 제사장과 레위족은 전전긍긍하거나 대담하게 맞불을 질렀다.
--(떼강도와) 전쟁하잔 말인가!

노르베르트와 수잔, 그대 두 선한 사마리아인이여!
7천만 한민족은, 떼강도 만난 2천만 나그네와, 지도자와 이웃을 잘 만나 ‘과분한’ 자유와 풍요를 누리느라 형제의 아픔을 거의 잊어버린 4천8백만은 그대 두 선한 사마리아인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민족이 이 지구상에 단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그대 두 선한 이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에게 목을 축일 샘물을 떠 주고 대신 인자(人子)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받아 마신 저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대들도 그대들이 방울방울 흘린 사랑의 눈물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마시게 되리라.

(200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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