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최고 권력자의 부인에 대한 호칭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황후(皇后), 태후(太后) 등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삼국(三國)시대에서 고려(高麗) 중기까지는 태황태후(太皇太后), 태상태후(太上太后), 대왕태후(大王太后)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朝鮮王朝) 들어서는 중국의 명(明)나라와의 국격(國格) 문제로 격이 낮아져서 태(太)가 대(大)로 낮추어 지고 후(后)도 비(妃)로 격하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로 불리어졌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인은 영부인(領夫人)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 권력자, 이를테면 왕이나 대통령의 부인과 생모를 국모(國母)로 호칭한 적도 있다. 조선왕조 26대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가 1895년 8월20일(음력) 일본자객(刺客)들에게 시해(弑害)당한 사건을 다룬 뮤지컬과 드라마에서 “내가 조선의 마지막 국모(國母)다”라고 외치는 장면도 나온다.
호칭이 태후든 대비든 국모든 최고 권력자를 보필하며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그 역할이 막중하고 막강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왕조시대 왕비 간택은 초간(初揀), 재간(再揀), 삼간(三揀) 등의 엄격한 절차를 거쳤다. 왕비가 될 자격은 “훌륭한 인품과 후덕함 그리고 현명한 지혜”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해야하며 넉넉한 도량(度量)을 가짐으로써 만백성의 숭앙을 받을 만한 큰 그릇의 은근함과 위풍을 가지는 것이 제일의 조건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이처럼 엄격한 선정조건이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해 큰 화근이 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왕비간택은 정략적으로 이뤄졌고 권력과 세력을 지키려는 자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역사의 불행도 많았다. 정쟁(政爭)의 중심에서 환란을 겪기도 했다. 최고 권력자의 부인은 그 호칭이 대비이든 영부인이든 최고 권력자에게 영향력을 미칠 정도의 막강(莫強)함, 막중(莫重)함, 막후(幕後) 실력자로 3막의 여인이었다.
왕조시대에 왕비 간택은 엄정한 심사절차가 있었으나 영부인은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 피선거권이 40세 이상으로 헌법에 명문화되어있기 때문에 영부인에 대한 자격심사는 실질적으로 어렵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그 부인은 자동적으로 영부인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고 그의 언행으로 영부인의 인품과 덕성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왕비나 영부인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이어야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야국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였고 공민왕의 부인 보탑실리는 원나라 공주였다.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는 일본 황족 출신이고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요즘 세상에 국모란 호칭은 적절치 못하다. 아부하는 자들의 간사일 뿐이다.
성품이 활달하고 쾌활하며 명랑한 것은 좋지만 처신이 경박하거나 경솔하며 경망스러운 것은 보기에 민망할 것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접근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국민의 눈에 쇼처럼 보여질 때 그것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할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기 전에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고 그 민심을 최고 권력자에게 바르게 전달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내조자(內助者)의 역할이 될 것이다.
고(故)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 내 야당이란 소리를 들은 것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하게 민의(民意)를 전한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그 모습이 지금도 국민의 뇌리(腦裡)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 교훈이 될 것이다. 대비는 만백성의 대비이어야 하고 영부인은 모든 국민의 영부인이어야 한다. 어느 특정 정파나 특정 세력에 깊이 몰입하면 영부인으로서의 자격과 그 위엄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국사(國事)로 남편을 따라 외국에 나갈 때 몰래 흙이나 파다가 국가를 배반한 자의 무덤에 갖다 바치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일 뿐 영부인이나 대비가 할 처신은 아니다.












국모? 지금이 이조시대냐? 대통령 처는 공무원이 아냐. 돈 쓰며 해외에 나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