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의 重病, 기로에 선 중동평화

인구 600만명의 지도자에 대하여 세계언론이 이렇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뇌수술을 받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에 대한 기사가 연일 세계 언론의 머리에 오르고 있다. 인구 600만명의 지도자에 대하여 세계언론이 이렇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생존하더라도 수상직을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政界에서 퇴장하는 것이 국제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강경파로 유명했던 샤론이 최근 들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독립국가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평화의 사도'로 변신했고, 이에 대해 국제사회의 기대가 커진 시기에 이런 변고를 당했다는 점이 또한 뉴스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샤론은 세번쯤 세계적인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맨첨은 1973년10월 그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단이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쪽으로 스에즈 운하를 渡河하여 시나이 반도에 진출했던 이집트 군대의 배후를 차단한 뒤 카이로를 향하여 진군할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습공격의 여세를 몰아 善戰하던 이집트 군대의 주력은 시나이 반도에서 역포위당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휴전을 제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81년 국방부장관이 된 샤론은 다음해 레바논에 대한 침공작전을 지도했다. 레바논을 기지로 삼아 활동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베이루트에까지 도달한 이스라엘 군대는 그러나 동맹관계에 있던 레바논의 기독교 군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학살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작전을 중단해야 했고 샤론 장관도 사임했다.

2000년 야당 리쿠드당의 당수였던 그는 예루살렘의 이슬람성당을 방문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聖地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고 저항운동을 시작하여 내전상태가 발생했다. 그 다음해 수상이 된 샤론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대해선 강경한 보복책을 구사하고 아라파트 의장의 행동을 봉쇄함으로써 피를 피로써 씻는 소용돌이가 4년간 계속되었다. 올해 샤론 수상은 국내유태인들의 반발을 누르고, 가자 지구에서 정착촌을 철수시킴으로써 강경노선에서 타협노선으로 돌아섰다.

샤론 수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독립국가를 허용하는 길만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항구적 존속을 보증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여론도 이런 샤론 수상의 변신과 정책전환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았다. 비로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에 돌파구가 열렸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미국 등 국제여론도 이런 샤론의 평화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샤론은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진다. 그가 창당하다시피한 리쿠드당이 자신의 정책을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않자 이 당을 떠난 것이다. 샤론은 새 중도정당을 만들어 올 봄 총선에서 제1당이 되고 안정적으로 평화정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는 샤론의 도박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측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샤론은 자신의 정치行路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有故상태에 빠져버린 셈이다.

1995년11월4일 라빈수상이 과격파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그때까지 착실히 진행되던 평화정착 노선이 일순간에 붕괴된 적이 있었다. 샤론 수상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11년 전의 수준으로 겨우 돌려놓았는데, 또 다시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지도자가 하차하게 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중동의 민주화와 석유수급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온 것이 미국에 대한 이슬람 사람들의 증오심을 키웠고 이슬람권의 이런 反美정서가 9.11 테러까지 이어진 국제테러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샤론이 죽어도 온건노선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리쿠드당의 새 당수가 된 네탄야후는 우익강경파로서 오는 총선에서 승리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혼란 상태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과 중동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가 지금 岐路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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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99512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라빈 수상 최후의 인터뷰 기사중 발췌부분이다.



1995년 11월3인은 금요일이었다. 토요일은 유태교에선 휴일이니 우리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금요일에는 대부분의 사무실이 휴무였다. 기자는 이날 오후 1시10분쯤 국방부로 들어갔다. 선물과 취재 노트, 카메라, 녹음기가 든 작은 가방 세 개를 들고 들어갔다. 국방장관실에 갖고 들어갈 때까지 가방에 대한 검색은 한번도 없었다. 믿는 사람에 대한 편의제공은 좋지만 만약 내가 테러리스트라면 라빈 총리의 목숨은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이 드는 것이었다.

장관실 입구엔 전화받는 비서가 한 사람 있을 뿐 손님이 앉아 기다릴 만한 공간도 의자도 없었다. 복도 한쪽을 파서 만든 곳이 대기실인데 문도 없고 소파만 양쪽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루 전에 만났던 해외담당 부국장 요시 드라즈닌氏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선물이 포장돼 있는 것을 보고는 검색은 생략하고 『총리 앞에서 풀라』는 것이었다.

오후 1시30분쯤 페레스 외무장관이 서류철을 들고 혼자서 장관실에서 나왔다.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눈 듯한 느낌을 주었다. 페레스는 라빈 장례식 조사 때 이날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했다.
『(그 사건) 하루 전날 우리는 단둘이서 만났었지요. 처음으로 당신은 일이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실토하면서 평화에 대한 의무감이 우리를 혹사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수행비서의 안내를 받으면서 집무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1시35분쯤이었다. 키가 기자와 비숫한(1백76cm쯤) 라빈 총리는 청색 양복 차림이었다. 맞은편 벽 쪽에 놓인 책상 뒤에 서서 기자를 맞았다. 기자는 목례를 하고 다가가서 악수를 한 뒤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담판하듯 맞 對面하는 형국이 되었다. 명함을 꺼내놓고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에 대한 설명을 해갔다.

『여기 다 적혀 있군요』
라빈 총리는 책상 위에 놓인 한 페이지짜리 타이프 메모를 보면서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인 것 같았다. 기자는 준비해간 질문지를 꺼내 놓고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라빈 총리측에서 한번도 사전에 질문 요지를 미리 보여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두 손 모으고 단정한 자세

―귀하가 지난해 12월에 한국을 방문한 이래 양국 사이엔 눈부신 교류·협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말씀해 주시지요.

『1966년에 저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저는 참모총장이었고, 한국은 朴대통령의 영도 아래서 1950년대의 전란을 딛고 막 국가재건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28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본 한국은, 그 변화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위대한 경제 발전에 의해 貴國은 이제 선진 공업 大國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三星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경영자들을 만났습니다만, 金泳三 대통령에 의해서 시작된 개방정책에 따라, 또 우리가 추진하는 평화정책(Peace Process)의 덕분이기도 합니다만 한국과 이스라엘은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 사이에 이스라엘 시장에는 자동차, 전자제품 등 수천 가지의 한국 상품들이 등장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군사력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 국가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 中東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는 극단적인 세력을 돕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아주 부정적인(Very negative)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북한과의 오랜 대결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소하려고 경제협력을 제의하는 등 노력을 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책임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공산전체국가(extreme Communist totalitarian)인 북한에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우리 두 나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이지만 위협 속에서도 평화 공존을 이룩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을 위한 계기를 마련한 우리에게 이제는 아랍국가들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카사블랑카 회의에 이어 며칠 전 열린 암만 중동정상회담은 이 지역에 새로운 경제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한국과 이스라엘의 협력에도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2주전 UN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본인은 金泳三 대통령을 1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과 영광을 가졌습니다. 거기서도 양국이 달성한 협력적 성과를 확인하고 그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라빈 총리는 남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예상대로 수수한 차림이었다. 얼굴은 붉었고 안경 뒤의 눈은 푸르고 깊었다. 응시하는 눈매이지만 위협적인 눈매는 아니었다. 정좌하여 책상 위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단정한 자세로 제스처 없이 천천히 말했다. 바리톤의 굵직한 목소리였다. 30초에 한 번씩 입술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가 서둘러 거둬들이는데 그 웃음이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도사를 하면서 『이제는 할아버지의 그 반쪽 미소(half smile)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자는 바로 그 웃음을 떠올렸다. 라빈 총리는 한국의 경제성장, 특히 공업력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을 「Great Industrial Power」라고 부를 때는 기자도 기분이 좋았다.

















『누구도 페레스와 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

―여기 들어오기 전에 페레스 외무장관을 보았습니다만 두 분이 서로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요사이는 또 그렇게 협력을 잘 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거의 50년 동안 서로를 잘 알고 지내오면서 기복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평화협상에 있어서 같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왜냐? 그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이룩하려고 꿈꾸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파트너입니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정책을 위해서 이렇게 만나고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손잡고 이 지역에 새로운 시대, 즉 평화와 경제적 번영이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덮어버리는 그런 새 장을 열고 말 것입니다』

라빈은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것』이란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그 다음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리란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로서는 최상급의 표현으로써 페레스와의 우정을 설명한 셈이다. 라빈 총리가 앉은 뒷벽엔 이갈 알론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알론은 라빈의 직속선배로서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팔마하 특공대의 창설자였다. 라빈과 알론은 형제처럼 친밀했다고 한다.

라빈과 페레스의 관계를 두 사람은 「뜻을 같이 하는 사이」, 즉 同志라고 정의했다. 라빈은 생애에 있어서 친구로서의 알론과 동지로서의 페레스가 있었던 것이다. 국방장관실엔 소파가 없었다. 예루살렘의 총리 집무실엔 최근에 소파가 들어왔다고 한다. 방의 크기는 서울의 구청장 방보다도 작았다.

―196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朴正熙대통령을 만났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죠.

『저는 당시 이스라엘軍의 참모총장으로서 군인의 입장에서 한국을 보았습니다. 판문점과 DMZ를 방문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위대한 경제발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감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이야말로 한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金泳三 대통령께서는 우리 내외를 위해 만찬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자리에서 그분이 말씀하기를, 민간인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30 몇 년 만에 자신이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모총장 출신으로서 수상이 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제가 처음」이라고요』

이때 처음으로 라빈 총리가 소리내 웃었다.

朴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경제발전이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정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서 라빈 총리는 경제를 이야기할 때 특히 즐거운 듯했다. 그가 주도한 중동평화협상의 목적은 평화정착 이후에 중동국가 간의 경제교류·협력을 진전시켜 이 지역에 경제 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집트 같은 나라는 이스라엘이 군사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경제적 패권을 지향하고 있다고 의심할 정도이다.


기자는 라빈 총리와 인터뷰를 끝낸 그 길로 텔 아비브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를 보낸 뒤 4일 밤 9시에 대한항공편으로 이륙, 5일 오후 5시에 김포에 도착했다. 오후 6시쯤 택시 타고 집으로 가는 차 중에서 기사로부터 라빈 피살 소식을 들었다. 1주일 전에 예고된 그 대중집회에서 그것도 동족에게 당했다! 가족의 죽음 이외에 그만한 충격은 10·26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기자는 비행기 안에서 인터뷰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대화를 정리했었다. 아직도 귓전에 울림이 큰 그 영감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데 죽었다니! 시간을 계산해보니 기자가 프랑크푸르트공항을 이륙해서 솟아오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라빈 총리는 피격되었던 것이다. 기자와의 인터뷰가 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육성토로가 되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기자는 이 만남의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좋은 기사로 승화시켜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죽음까지도 朴正熙와 라빈은 비슷했다. 동포에 의한 저격. 라빈 저격범도 한때는 라빈을 영웅으로 숭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빈은 총구와 유혈로써는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요르단江 西岸과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人, 그것도 원수 중의 원수였던 PLO에게 돌려주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건국정신을 대표해온 시온주의자들은 ①유태국가,②민주국가, ③유태인의 역사적 고향땅(유데아-사마리아로 불린 구약성경시대의 땅 지금의 요르단江 西岸)을 완전히 차지한 국가, 이런 국가를 창건하기를 원했다.

1948년에서 1967년까지 시오니즘은 본래 목표의 두 가지만 달성된 상태였지만 그렇게 살았고 그 속에서 번성을 계속했다. 이스라엘은 유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태국가였고 또 민주 국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태인 고향땅의 일부만 차지한 국가였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으로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그 결과 시오니즘이 본래부터 추구했던 유태인의 역사적 땅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후 이스라엘인들은 또 다시 근본적인 질문에 마주쳐야 했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하나의 선택 방안은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를 포함하여 모든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고 유태 국가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人 거주자들을 영구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리적 탄압을 통해 그들이 결코 정치적 권리를 얻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선택은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 지구를 포기하고 민주 국가로 남는 것이었다. 이것이 라빈의 선택이 됐다. 요르단江의 西岸을 구약성경시대의 유데아-사마리아 지역으로 부르며 신성시하는 보수적 유태교인들과 이 지역에 이주해 살고 있는 13만명의 정착민들에겐 라빈이 저주의 대상이 돼 버렸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대전환에서 라빈은 제물로 바쳐졌다.

그의 사위 펠로소프氏가 말했듯이 유태인들(다른나라의 대중도 마찬가지이지만)은 라빈을 하나의 도구로 쓴 셈이다. 나라를 세우고 지킬 때는 戰士로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는 제물로서 쓰여졌던 사람이 라빈이었다. 아낌없이 준 나무, 사지가 다 잘려나가고 남은 밑동까지도 지친 행인에게 빈 자리로 내 놓는 그런 나무였건 것이다.

아쉘 나임 前 駐韓 이스라엘 대사는 라빈의 죽음이 중동평화에 기여한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 70여개 나라에서 頂上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미국에선 前 현직 대통령 4명, 전·현직 국방부장관들, 상하원의 의장·총무,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의 지도자까지 왔습니다. 이 자체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중동평화에 대한 세계 여론의 일치된 지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젊은층이 특히 라빈의 죽음을 애도했고 침묵하던 다수는 침묵을 깨고 나왔으며 우익과 격세력은 수세에 몰려 변명에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라빈 만큼 신뢰를 받는 지도자를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된 점은 크나큰 손실입니다. 어차피 그의 죽음은 건국세대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이스라엘과 한국의 협력관계가 외교·군사·경제·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발전되고 있으므로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난 괜찮아』

기자는 라빈 총리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얼굴 세 사람이 보였다. 페레스, 펠로소프, 요나단…. 기자는 라빈 총리의 피살에 대해 총리 대리로 페레스만큼 진정으로 통탄한 이도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싸우고 화해한 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시기에 평화협상의 후원자를 잃은 페레스의 침통한 얼굴을 보니 라빈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부부처럼 라이벌도 오래 싸우다가 보면 얼굴이 닮아가는 모양이다.

라빈으로선 페레스가 죽음의 곁에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으리라. 그가 들고 뛰다가 쓰러진 평화의 횃불을 확실하게 이어받아 달릴 同志가 지키고 있었으니까. 朴正熙의 죽음 뒤엔 혼란이 왔으나 라빈의 죽음 뒤에도 이스라엘은 질서 정연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힘일 것이다. 비상사태가 닥쳤을 때는 한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다수에 바탕을 둔 민주체제가 더 강한 것이다.

















이츠하크 라빈(1922∼1995)의 생애

▲이츠라크 라빈은 1922년 3월1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모세 다얀이 이끄는 하가나에 들어간 그는 1941년 팔마하 특공대의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했다. 소대장으로 승진된 그는 1945년 아틀리트 수용소에서 2백명의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해 낼 때 부책임자로 작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6월 그는 이른바 「검은토요일」 사건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10월 라빈은 팔마하의 부사령관이 되어 알론 바로 밑에서 일했다. 1948년 봄 그는 하렐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길을 뚫는 나손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과 세이크야라를 해방시켰다. 알론의 지휘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전선 작전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市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1946년 로도스 섬에서 아람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라빈은 1953년 영국의 참모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54∼1956년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되었고, 1956∼1959년에는 북부지구 사령관으로, 1959∼1960년에는 작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61년 참모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1일 제7대 이스라엘 국방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6일전쟁」 때 라빈은 참모총장으로서 이스라엘 인민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1968년 1월1일 전역과 동시에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73년 봄 라빈은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노동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73년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 때 노동장관에 임명되었다.

▲1974년 6월2일 골다 메이어의 사임 이후 이스라엘 국회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끄는 신정부를 승인했다. 라빈이 총리직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경제력 강화, 사회문제 해결, 이스라엘 軍 증강에 역점을 두었다. 1974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 시리아와의 철수 협정이 조인되었으며, 이어 1975년에는 이집트와의 잠정 협정이 맺어졌다. 1976년 6월 라빈 정부는 엔테베 작전을 통해 공중 납치된 에어 프랑스기의 승객들을 구조했다.

▲1977년 4월 라빈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5월 총?이후 1984년 9월 거국내각의 성립 때까지 라빈은 크네세트에서 야당인 노동당 소속으로 외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84∼1990년의 거국내각에서 이츠하크 라빈은 국방장관을 지냈다. 1985년 1월 그는 이스라엘 軍 병력의 레바논 철수를 제안했으며 이스라엘의 북부 국경선 지대에 있는 정착촌들에 평화를 보장하는 안전지대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2년 7월 라빈은 총리겸 국방장관으로서 제 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총리로서 평화협상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업적을 올렸다.

▲1993년 9월13일 백악관 정원에서 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기본원칙 선언 서명식에서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1994년 10월26일 이스라엘-요르단 국경에서 그는 이스라엘-요르단-팔레스타인 잠정협정의 서명자였다.

▲라빈은 1994년 12월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1995년 11월4일 (한국 시간 11월5일 오전) 텔 아비브의 말체이 이스라엘 광장에서 열린 평화지지 집회에서 연설 직후 암살되었다. 그의 유족으로는 누이 라헬, 부인 레아, 자녀인 달리아와 유발, 그리고 손주 세 명이 있다. 라빈의 자서전 「서비스 노트북」은 1979년에 출간되어 영어와 불어로 번역되었으며, 에이탄 하버가 정리한 「이츠하크 라빈의 각국 지도자들과의 대담집」은 1984년에 출간되었다.

金泳三대통령 초청 만찬장에서 한 라빈의 연설 요지(1994년 12월15일)

『우리 양국은 과거와 미래를 공유』

대통령 각하, 서울과 예루살렘 사이의 거리가 수천km나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같은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이웃입니다. 한국과 이스라엘 양국은 古代史를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양국 국민들은 모두 자국의 문화와 민족의 역사적 유산을 자부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 문화를 보존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韓國과 이스라엘 양국은 주변의 강대국들 속에서도 자국의 민족적 동질성을 단호하고 끈기있게 보존해 왔습니다.

韓國과 이스라엘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가장 중요한 사회 구성 단위로서 전통적으로 가정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양국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가장 중시하며 그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경제는 여러 모로 상호 보완적입니다. 서로가 상대국에서 많은 기회들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산업의 고도 발전과 소비재의 대량 생산에 도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부가가치의 하이테크 품의 제조 그리고 과학적 창조성과 기술 혁신에 기초한 상품 개발에 주력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그리고 고도로 발전된 한국의 산업과 마케팅은 양국의 결속 기반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우리 양국의 협력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입니다. 이스라엘은 한국에 높은 수준의 연구개발 시설과 고학력 인력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은 한국의 산업 성장을 지속시키고 한국의 기술적 기반을 G-7 국가들 수준으로 향상시키려는 한국의 중요한 과제에 기여할 것입니다.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1994년 7월 26일)

저 금속 덩어리로부터 수천의 꽃들이 피어나…

매년 이스라엘 전사자 기념일이면 나는 예루살렘의 마운드 헤르츨 국군묘지로 갑니다. 거기서 나는 무덤과 묘석들, 그 위로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수천의 눈망울과 마주치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그 커다란 침묵의 군중들 가운데 서서 미국의 유명한 시인 아치볼드 맥레이시의 표현처럼 그들의 눈동자에서 젊은 전사자들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다음은 그의 시 구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묻는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평화와 새로운 희망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헛된 노력이었는지를. 그러나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그 대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들 이라고〉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워싱턴에 온 것은 말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가 우리의 목표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평화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이 미국 국회의사당에 나와 함께 방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위대한 평화의 꿈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동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미람 카플란입니다. 그의 첫 번째 형제는 사고로 사망했고 두 번째 형제는 테러리스트들을 추격하다 사망했습니다. 세 번째 형제는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모세 사손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압둘라 왕과의 회담을 비롯한 여러 평화회담에 밀사로 참석한 바 있습니다.

▲차나 리블린입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반 친구로서 요르단을 바라보고 있는 게셔키부츠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진 전투를 견뎌냈으며 또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었습니다. 요즈음 그녀는 자기집 창문을 통해 요르단을 바라보며 평화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다스칼입니다. 나이가 거의 90세나 되시는 이 분은 트랜스요르단에 있는 전기회사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세인 국왕의 초대를 받아 그 생신 잔치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살아 생전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희구하고 있습니다.

▲다니 마트입니다. 독립전쟁 때 요르단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쟁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주를 세대에는 다시는 전쟁이란 것을 모르기 바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국의 복합적인 관계는 한 세대 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귀국과 우리나라가 특별한 유대 관계에 있었던 좋은 기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양국이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모진 기억들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하의 할아버지이신 압둘라 국왕의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유태인 족장들과 신생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평화의 길을 추구하셨습니다.

후세인 폐하, 우리는 우리 생애에 많은 일들을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보아 왔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려 하십니까. 나는 나의 자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나에게는 오로지 꿈밖에 없습니다. 보다 나은 세계, 상호 이해와 조화의 세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인 세계, 이런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꿈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 많은 것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의 평화 속에서 우리의 손을 맞잡아 주신 데 대해, 당신의 정치적 총명과 용기에 대해, 우리들 가슴속에 당신의 신민(臣民)들 가슴속에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마디하겠습니다. 군번이 3-0-7-4-3으로 과거 이스라엘 군에서 장군을 지낸 나이지만, 오늘은 내 자신을, 평화를 위한 군대의 병사라고 생각합니다. 군인으로서 27년 동안 조국을 위해 봉사했던 내가 지금 요르단 국왕이신 폐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는 피도 고통도 없는 전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 하나하나가 기쁨일 수 밖에 없는 유일한 전투입니다. 평화의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는 무수한 꽃들이 저 녹슬어 가는 장갑차 잔해들을 뒤엎을 것입니다. 장갑차라니요, 정말이지 그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전혀 얼토당토 않은 존재들입니다.

훗날 그 침묵의 금속 덩어리들로부터 수천의 꽃들이 피어나 「샬롬」이라는 평화의 말고 함께 우리에게 미소 지을 것입니다. 우리의 책 중의 책인 성서에는 평화라는 말이 아주 다양한 문맥 속에서 2백37회나 언급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성서에서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힘을 이끌어 냅니다.

에레미야서에는 라헬 족장에 대한 비탄의 글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의 입에서 울음소리를 거두어라. 너희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라. 왜냐하면 그들의 노고가 보상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니라.

라빈 장례식 각국 지도자들의 추도사

후세인 요르단 국왕:『당신은 평화의 戰士였습니다』

라빈 총리는 우리가 경계선 저편에서 만난 한 형제, 한 동료, 한 친구, 한 인간, 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존경했듯이 우리는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와 우리는 그 경계선을 걷어내야 한다고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우리에게 모두 유익한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이렇게 슬퍼할 순간이 오늘처럼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신은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당신은 평화를 위한 戰士로서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들 가슴을 열고 평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진영에 속합니다. 리빈 총리에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약속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과 요르단에 있는 나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세계에 대해 다시금 약속합니다. 라빈 총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유산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오면 내가 남긴 유산도 나의 선조나 이츠하크 라빈의 그것과 같기를 희망합니다.









RAZ: The entrance to the west wing of the Hadassah Medical Center is littered with the cigarette butts of the international media. They are gathered here in Jerusalem, holding vigil outside this hospital, waiting, pacing, smoking, drinking coffee ... anything to cope with the anxiety.

This is a big story.

It's evident from the multitude of languages spewing out to the line of cameras pointed at the hospital entrance.

But what makes it a big story? Why is the world concerned about the condition of a man who, in simple numbers, leads a country of 6.2 million people?

If French President Jacques Chirac or German Chancellor Angela Merkel or Indian Prime Minister Manmohan Singh suddenly fell seriously ill, would the global media cover the story hour by hour?

Probably not.

But this ancient land is the holiest piece of real estate in the world for both Jews and Christians, and revered by Muslims. It is also central to Islamic identity as the site of brutal conflicts, first with Christian Crusaders and then Western powers.

Today it is a piece of land that many believe eventually will be divided between two nations -- Jewish and Palestinian Arab.

As the 21st century moves into its sixth year, many people have come to accept the geopolitical reality that neither nation can control the entire territory. Political progress taught Ariel Sharon that lesson.

It's why his condition matters. (Sharon rushed to hospital) Because at the heart of this story is the condition of the world. Beyond that is the U.S.-backed effort to promote democracy in the Middle East. Consecutive U.S. administrations have realized that resolving this conflict is key to resolving a major diplomatic headache.

Ariel Sharon -- onetime military hero and champion of Jewish settlements in occupied land -- did not become a peacenik. But he did become a pragmatist. He came to believe that the only rational and realistic solution to this conflict between the Israelis and the Palestinians was to divide the land. And for a man who spent much of his public life denying this, his political turnabout was all the more remarkable.

In simple terms, Sharon really was the only one -- the only man capable of convincing his population that the time had come to face reality.

But even in his own country, Sharon had his critics: those on the left who could never forgive his military campaign in Lebanon; those on the right who regard him as a turncoat for abandoning Jewish settlements in occupied Gaza.

We do not know if Sharon's political successors will have the force of personality to push through the necessary measures to divide this piece of land.

Bu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s invested in this conflict. And they started to like Ariel Sharon. Now, they wonder, who will come next?

In the meantime, outside Hadassah hospital, those who disseminate the information to their respective audiences around the world wait, some smoke, many drink coffee, but all are anxious for more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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