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 북한정권의 急所는 우상(동상과 미이라)

2004년 이후 중단된 휴전선상의 對北방송을 재개하든지, 김일성-김정일의 미이라 보관소나 평양의 김일성 동상을 파괴하는 '인도적 보복방법'(사람을 죽이지 않으므로)도 연구, 검토해 볼 만하다.
연일 북한정권으로 추정되는 집단에 의한 對南 '사이버 테러'가 계속되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실효성 있는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제도 조갑제닷컴 등 애국 우파 성향의 인터넷 언론이 공격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계획적으로 다른 나라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 행위이다. 사이버 테러는 다른 나라 국민들의 재산을 공격하고 그 결과로 사람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병원, 구급시스템, 안보 기능 등에 대한 사이버 공격 등) 정부는 이를 전쟁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응징 대책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정부를 믿을 수 있고, 敵도 더 이상의 공격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朴槿惠 대통령의 '단호 대처' 천명은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면 헛소리가 된다.


사이버 테러는 '武器를 쓰지 않는 전쟁행위'이므로 상응하는 보복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04년 이후 중단된 휴전선상의 對北방송을 재개하든지, 김일성-김정일의 미이라 보관소나 평양의 김일성 동상을 파괴하는 '인도적 보복방법'(사람을 죽이지 않으므로)도 연구, 검토해 볼 만하다. 북한정권은 우상체제이고 우상이 무너지면 체제도 무너진다. 우상은 김일성-김정일이고, 동상이며 미이라이다. 이게 북한체제의 急所이다. 북한정권은 겉으론 강고하게 보이지만 속으론 약점이 있다. 이것을 찾아내 때리면 쉽게 부서진다. 북한정권이 한국군의 김일성 동상 파괴 계획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자체가 급소를 건드렸다는 증거이다. 조지 오웰은 공산주의와 싸울 때는 같은 광신적 방법을 쓰지 말고 머리를 써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우리도 머리를 써야 한다. 빨갱이-양아치-거짓말쟁이를 상대할 때는 같은 수법을 쓰면 손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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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이 공식 성명을 통하여, 그것도 되풀이하여 한국과 미국을 핵무기로 선제공격하겠다고 협박한 것은 1945년 原爆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原爆을 보유한 모든 나라는 최후의 방어용으로 이를 사용하겠다는 입장이지 선제공격용이라고 선언한 국가는 없다.

북한정권이 핵무기 선제공격을 공언함으로써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는 응징권을 갖게 되었고, 북한정권은 전쟁범죄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핵무기 선제 공격을 위협하는 戰犯집단에 대하여는 예방적 핵공격을 해도 정당방위에 해당할 것이다. 북한정권의 核선제공격 협박은 유엔 안보리에서 전쟁범죄나 反인류범죄로 다뤄야 할 사안이다. 朴槿惠 정부는 이 발언을 국제사회에 확산시켜 세계 여론을 들끓게 해야 할 것이다. 김장수-윤병세-유길재 수준의 人的 자원으로 가능할지는 별개 문제이지만, 朴 대통령의 결단에 기대한다.

북한정권의 핵무기 선제공격 협박에는 그에 준하는 고강도 심리전과 보복전략이 있어야 한다. 핵선제공격 협박 주모자를 테러主犯으로 규정, 암살하는 행위도 정당방위에 속할 것이다. 만약 이란 정권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런 협박을 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암살팀을 만들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응징책은 主體敎의 神殿(신전)인 김일성-김정일屍身보관소, 즉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우상숭배 체제인데, 두 우상이 미이라가 되어 누워 있다. 이 궁전은 북한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聖所이다. 북한정권이 도발하면 전투기나 미사일로 이 궁전을 부숴버려야 한다. 이는 우상 파괴의 효과를 부를 것이다. 북한주민들을 억누르던 두 惡黨의 그림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해버리면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이는 북한정권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잃는 것은 두 미이라이고 얻는 것은 자유이다. 북한정권의 急所인, 주체교의 상징물을 폭파시켜버리겠다고 경고해두는 것도 절묘한 억지수단이 될 것이다.

금수산 궁전을 폭격한 직후 韓美연합군은 "만약 북한군이 서울을 공격하면 핵무기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全面戰 가능성을 내거는 것이다. 김정은 一黨은 韓美軍을 상대로 전면전을 할 경우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게 또한 저들의 약점이다.

이런 發想은 2년 전 對北정보부대 지휘관 출신인 한철용 장군이 낸 것이다.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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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기사 再錄

북한은 휴전선 일대의 현 진지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장거리 170mm 자주포와 240mm 방사포를 전방 휴전선 일대에 배치하기 시작하면서, 1994년 3월 판문점 군사회담 북측대표 박영수 대좌가 ‘서울 불바다’론으로 공갈협박을 가해 왔다.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수틀리면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만일 북한이 서울을 포격하면,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북한 포병발사 진지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현재 서울 수도를 지향하고 있는 300여 문의 장사정포를 전부 무력화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일단 서울에 포탄이 집중적으로 떨어지면 서울이 공황에 빠지게 된다. 북한은 이를 간파하고 수틀리면 서울을 포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서울을 아예 포격할 수 없도록 하는 전술전략을 강구해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김정일을 심리적 공황에 빠지게 할 우리의 방책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우리도 평양을 포격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한다. 역대 국방장관 중 어느 장관은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에 맞서 ‘평양도 서울에서 2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는 평양도 우리의 사정권 안에 있어서 평양이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양을 포격하면 김정일이 우리만큼 큰 충격을 받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김정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 자체가 인명과 인권을 우리 자유민주 체제처럼 중시하고 존중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공황에 빠질 만한 표적이 평양에 없는가. 한 곳이 있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이다. 내재적 접근법에 의해 볼 때, 김정일 북한의 급소, 즉 아킬레스건은 금수산 기념궁전이다. 만일 북한이 서울을 포격하면 우리가 이 금수산 기념궁전을 미사일로 포격하는 것이다.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에게 금수산 기념궁전은 김일성 시신이 안치돼 있어서 신성시되는 신전(神殿) 또는 성전(聖殿)이나 다름없다. 금수산 기념궁전은 김정일 북한의 최대의 약점이고 급소다. 우리에게는 둘도 없는 좋은 표적이다. 김일성 시신을 대피시킬 수 있지만, 그 궁전을 갱도로 대피시킬 수는 없다. 금수산 기념궁전을 포격함으로써 김일성 주체사상의 혼(魂)을 빼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김정일은 혼비백산해 심리적 공황에 빠지게 되어 혼절하게 될 것이다. 우리 서울이 공황에 빠지듯 김정일과 북한이 공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김정일이 과연 서울을 포격할 수 있겠는가?

금수산 기념궁전은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포격해도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우려가 없다. 오히려 수많은 북한 주민을 굶겨 죽이면서까지 8억 달러나 들여 건축한 궁전이기 때문에 파괴되어야 마땅한 건축물이다. 또 거기에는 북한 주민이 거주하지 않아서 인도적 측면에서도 표적으로 부적합한 곳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듯, ‘금수산 기념궁전 불바다’ 발언을 함으로써 싸우지 않고 북한의 ‘서울 불바다’ 포격 의지를 근원적으로 꺾는 것 또한 최선의 방책이다.


출처 : 월간조선 2011년 1월호 기고중 발췌

[ 2013-03-11, 00:20 ]


Editor's note: Sung-Yoon Lee is the Kim Koo-Korea Foundation professor in Korean studies and assistant professor at the Fletcher School of Law and Diplomacy at Tufts University. As tensions mount on the Korean Peninsula, Wolf Blitzer explains what's behind the threats and what's at stake in a special edition of "The Situation Room," tonight at 6 p.m. ET on CNN.

(CNN) -- North Korea is no laggard when it comes to bluster and vituperation.

For decades, the regime has issued threats of turning South Korea into a "sea of fire" or used choice words such as "human scum" or "political idiot" when denouncing South Korean and U.S. leaders.

But even measured against such standards, North Korea's barrage over the past month, from threatening to launch an "all-out war" to "diversified precision nuclear strike" against Washington, "wipe out" a South Korean island, or hurling a sexist insult against Park Geun-hye, South Korea's first female elected leader, to, most recently, warning of an imminent "moment of explosion," is quite unusual.


Sung-Yoon LeeAnd now, after saying that plans for merciless operation has been "finally examined and ratified," Pyongyang is hinting at another long-range missile launch.

What's going on?

First, we must assume the North Korean leadership is not crazy or suicidal in spite of bizarre things it says and d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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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 totalitarian and solipsistic the Kim dynasty surely is. But the fact that it has managed to preserve itself for more 60 years and, in the post-Cold War era, in spite of the everyday existential threat of facing an immeasurably more successful Korean state across the border, the impoverished North has shown itself to be, if nothing else, calculating and resilient.

Opinion: Kim Jong Un is not crazy

What is Pyongyang calculating? The same it has since the end of the Korean War 60 years ago. The two constants in North Korea's foreign policy are its continual calls for the withdrawal of U.S. troops from South Korea and blaming "U.S. hostile policy" for the tension enveloping the Korean Peninsula.


Crowley: N. Korea's crazy, not suicidal"
North Korea to launch mobile missile?
North Korea threatens 'merciless' strikes
China changing tone on North Korea?
U.S. ready to calm North Korea tensions Pyongyang sees the U.S. commitment to the defense of South Korea, as powerfully symbolized by the presence of American troops in the South, as the greatest impediment to its highest state task. As North Korea states in the charter to its communist party, that task is to "(en)sure the complete victory of socialism in the northern half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d the accomplishment of the revolutionary goals of national liberation and the people's democracy on the entire area of the country." In plain language, that means dissolving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communizing the entire Korean Peninsula by force.

North Korea's frequent threats are a means to a long-term end.

The first step is to impregnate the South Korean public with war hysteria and the illusion that the withdrawal of U.S. troops would lead to peace and reconciliation between the two Koreas.

The second is to instill fear in the American public by one day demonstrating its capability to marry a nuclear warhead with an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with the range to hit the U.S. West Coast. When that day comes, Washington may have second thoughts about its treaty commitment to the defense of South Korea, Pyongyang calculates.

So far, timing seems to be in Pyongyang's favor. Over the past year, all the major powers in North Korea's neck of the woods have undergone a leadership transition. Moreover, in Seoul, Beijing and Tokyo, leadership transitions have occurred only in recent months.

That creates a particularly appeasement-prone environment, as no newly elected leader wishes to spend political capital on a foreign policy crisis created by North Korea when many other pressing domestic issues beckon.

So Pyongyang reckons that after ratcheting up tension as high as it can and then simply take a little step back, it can lure its richer interlocutors into returning to talks and the kind of concessionary aid worth billions of dollars we have seen in the past.

This means the risk of North Korea starting an all-out war is quite small, although there is always the possibility of miscalculation. It also means that Pyongyang will most likely not just go quietly into the night after having thumped its chest for so long. We should expect some kind of deadly, although limited, attack to come soon.

How should Seoul and Washington respond?

For starters, they could clamp down on the North's multifaceted criminal activities and put psychological pressure on the elites. Second, they could raise awareness on North Korea's systematic and widespread human rights violations so that democratic countries come to view the regime as a threat to humanity instead of some abstract amalgamation of the dreadful and the bizarre.

This approach may not yield immediate changes in regime behavior. But at the very least it will finally put the "stick" in the proverbial carrot-and-stick metaphor for taming Pyongyang.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브리튼 우즈의 전투: 존 메이너드 케인즈, 해리 덱스터 화이트, 그리고 새 세계 질서 만들기’란 책을 펴냈다. 필자는 권위 있는 외교정책 잡지 ‘포린 어페어’를 발행하는 미국의 외교협회 국제경제 담당 국장 벤 스틸(Benn Steil). 한국인과 친숙한 IMF 창립의 설계자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흥미롭다. 高官(고관)과 지식인들의 이른바 고급 간첩, 고급 반역질이 횡행하는 한국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아 소개한다.
1944년 7월 2차 세계대전이 노르망디 부근에서, 獨蘇(독소)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리턴 우즈에서 만나 戰後(전후)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할 기구의 설치를 논의하였다. IMF(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리턴 우즈 시스템의 두 설계자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미국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일벌레였다. 그는 디테일에 강했고, 정책을 논리적 구조로 정리하는 데 뛰어났다. 화이트는 케인즈와 자주 다투었다. 영국여왕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화이트는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정책을 건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제국의 쇠퇴기를 이용하여, 달러 중심의 戰後(전후)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는 영국에 敵對的(적대적)이었지만 소련엔 우호적이었다.
1944년 초 연합군은 독일을 점령한 뒤 발행할 화폐(마르크)를 미국이 인쇄한다는 데 합의한다. 소련은 ‘우리도 인쇄할 권리가 있다’면서 미국의 인쇄 동판을 사용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면 소련은 원하는 만큼 돈을 찍을 수 있게 된다. 미국 재부무의 造幣(조폐)담당 국장 알빈 홀은 반대하였으나 화이트는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소련을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 이 거래로 소련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는 소련의 전쟁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을 다른 동맹국과 똑 같이 믿어야 한다.”
모겐소 재무장관은 화이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예상한대로 소련은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마르크를 많이 찍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100억5000만 마르크를 찍은 데 대하여 소련은 780억 마르크를 찍었다. 화이트는 소련이 발행한 마르크를 미국이 소련에 유리한 고정 환률로 매입하였다. 지금 돈으로 소련은 약65억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전후 국제통화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브리튼 우즈 회의에서도 화이트는 다른 나라 대표들을 화나게 만들면서까지 소련에 유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의에서 소련이 브리톤 우즈 조약을 비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미국이 소련에 100억 달러의 저리 재건 차관(對英차관 제안액의 세 배)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를 이유로 IMF와 세계은행 창립 참여를 거부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이트를 IMF 총재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전 단계 조치로 1946년 1월23일 화이트를 미국을 대표하는 이사로 임명하였다. 2週(주) 뒤 FBI(미연방수사국) 국장 에드가 후버는 대통령에게 “화이트는 소련 지하 첩보 조직의 助力者(조력자)”라는 보고를 올렸다. 후버는 화이트가 “미국 정부 안에 소련 정보 조직을 심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상원은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화이트의 임명에 동의하였다. 트루먼은 잘못하면 정치적 스캔들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 화이트를 총재로 추천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미국인을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 자리 모두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IMF 총재 자리는 양보하였다.
루스벨트-트루먼 정부는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망에 대한 보고를 해도 묵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반공노선을 확실히 하였지만 그가 인수한 민주당 정부 안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찬동하여 참여한 공산주의자와 親蘇(친소)분자들이 많았다. 화이트에 대한 FBI의 內査(내사)만 있었을 뿐 공개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이트는 재무부와 IMF를 사직하고, 1948년의 진보당 대통령 후보 헨리 월레스 선거 운동을 도왔다. 親蘇的(친소적)인 월레스는 상무장관으로 트루먼 행정부에서 일했으나 對蘇(대소)강경 정책에 반대, 그만둔 뒤 출마한 것이다. 월레스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里程標(이정표)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념 지형상 ‘미국판 김대중’의 역할을 했는데 다른 점은 낙선했다는 사실이다. 월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화이트는 재무장관, 다른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국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챔버스)이 미 하원의 非미국인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冒頭(모두) 발언에서 그는 “나의 신조는 미국의 신조이다”면서 “나는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다”고 주장하였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화이트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폭로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僞證罪(위증죄)로 걸기 위하여 간첩 챔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이 곧 밝혀졌다.
다음 날 그는 뉴헴셔 주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던중 심장발작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위터커 챔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寫本(사본)을 제시한 것이다. 문서 原本(원본)은 챔버스가 보관하다가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챔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미 국무부와 재무부 관련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미국의 對日(대일)정책, 예컨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와 자산 동결 조치, 일본의 석유저장소와 군에 의한 방어 상황,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비밀 대화록 등등. ‘대통령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된 對日(대일)경제전쟁 계획은 재무부 이외엔 비밀에 붙여져 있다’는 화이트의 메모도 있었다.


‘브리튼 우즈의 전투’ 저자 벤 스틸은 화이트는 엘저 히스보다도 소련에 더 중요한 간첩이었다고 평했다. 화이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소련 첩보기관의 두더지(mole)' 역할을 하였다. 그는 소련에 미국 정책에 관련한 정보과 조언을 전달,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미국 정부 내에서 정책 협의를 할 때는 소련 편을 들었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완벽한 정책 협력자였다. 화이트는 일찍 죽는 바람에 기소를 면하였으나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첩보기관은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을 오고가는 외국기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 계획(Venona Project)을 실천에 옮긴다. 이 계획의 全貌(전모)는 冷戰(냉전)이 끝난 뒤 공개되었다. 미국이 소련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것은 1946년이었다. 이에 따라 보존된 과거의 통신자료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의 이름(암호명)이 등장하는 자료는 18건이고, 1944년 3월16일부터 1946년 1월8일까지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헌장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는 미국 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자로 위장한 소련 KGB(정보기관) 간부 블라디밀 프라브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프라브딘에 모스크바 본부로 보고한 電文(전문)을 해독해보니, 화이트는 “트루먼과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번 회의가 성공하도록 원한다.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주는 데 동의할 것이다”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화이트가 소련에 “지금 추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미국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준 사실, 화이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련 동조자를 미국 정부 내 관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문도 解讀(해독)되었다.
화이트를 변호하는 이들은 ‘프라브딘이 소련 첩보원인 줄 모르고, 즉 기자인 줄 알고 그런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냉전이 끝난 후 KGB 자료를 본 서방 학자들은 미국 정부 내의 다른 ‘소련 두더지’가 소련 첩보 기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화이트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이 그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베노나 계획이 해독한 암호엔 이런 내용도 있다.
<우리와 협력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는) 그의 아내가 어떤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나 비밀이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화이트가 건네주는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轉向하였던 챔버스는 1953년에 평하기를, “화이트는 미국의 對蘇(대소)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수립할 수 있는 완벽한 관료였다”고 했다.

‘브리턴 우즈의 전투’ 著者(저자) 벤 스틸은 왜 이런 엘리트가 ‘소련의 두더지’가 되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그는 <화이트 사건은 證人(증인)과 凶器(흉기)는 있는데, 범행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면서 동기를 추적하다가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장된 화이트 관련 자료뭉치에서 ‘노란 종이 위에 쓴 메모’를 찾아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때인 1944년에 쓴 것이다. 제목은 ‘미래의 정치-경제’였다. 저자는 이 자료가 知的(지적)
으로 야망에 불타던 사람의 사고방식과 열망을 알게 하는 창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메모를 보면 화이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從北(종북)좌파 분자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誤判(오판)을 연상시킨다.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모든 경우에 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경쟁과 자유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는 늘어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소련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현재 소련이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西歐(서구)가 소련을 惡魔(악마)로 그리는 것은 위선이라면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再侵(재침)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군사동맹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이런 구상에 대한 걸림돌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애국심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매우 강력한 가톨릭 위계 질서’,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동맹하면 자본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룹’이다. 화이트는 이런 反蘇的(반소적) 생각의 핵심은 경제이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이념의 원천이라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 벤 스틸은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전략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면서 화이트 메모의 결론을 소개하였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첫 번째 경우인데, 잘 돌아간다!>
著者(저자)는 화이트의 正體(정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戰後 세계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설계자는 소련의 행태를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소련이 미국의 중요한 友軍(우군)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소련의 대담한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한 탓이다.>


著者(저자)는 화이트는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격동의 1920, 30년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미국의 ‘소련사랑’(Russophile)' 세대의 작가나 관리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공황,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성의 붕괴를 목격한 이 세대는 혁명적인 정치 경제 질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이 혁명 뒤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파시즘과 맞서는 것을 보고, 나중엔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본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親蘇(친소)로 기울었다. 이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고 정부에 참여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소 분자들의 宿主 역할을 하였다. 그는 戰後 세계 질서가 美英이 아니라 美蘇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를 올려도 묵살하였다. 루스벨트도 화이트처럼 소련과 스탈린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이트는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진보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친소-좌경화되었다. 소련의 계회경제에 매혹되어 로렌스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 직후 소련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한 적도 있다. 재무부가 금융 개혁 부문에서 일할 것을 권유,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1934년부터 그는 다른 親蘇분자들과 함께 소련의 지하 공작망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었다. 엘리트 관료와 간첩질이란 二重(이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는 ‘미국판 386세대’인 셈이다. 광주사태와 민주화의 격동기에 친북좌경화한 세대가 오늘날 한국의 중추를 장악, 국가의 進路를 왼쪽으로 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대도 북한정권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著者(저자)는 화이트를 ‘그와 같은 開明(개명)된 관료집단이 미래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이런 이들은 정부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능력 이하라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의 노련한 공작원은 이런 심리를 간파, 화이트 같은 이들의 역할을 미화하여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수법도 썼다. 화이트는 소련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하는 간첩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 하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정리하여 주간, 격주간으로 전달책인 챔버스에게 건네주곤 하였다.
화이트 같은 자발적 간첩들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轉向(전향)한 소련 간첩(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誤導(오도)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동맹이다, 러시아는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 영국에 주는 것을 러시아엔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을 러시아에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브리튼 우즈의 전투: 존 메이너드 케인즈, 해리 덱스터 화이트, 그리고 새 세계 질서 만들기’란 책을 펴냈다. 필자는 권위 있는 외교정책 잡지 ‘포린 어페어’를 발행하는 미국의 외교협회 국제경제 담당 국장 벤 스틸(Benn Steil). 한국인과 친숙한 IMF 창립의 설계자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흥미롭다. 高官(고관)과 지식인들의 이른바 고급 간첩, 고급 반역질이 횡행하는 한국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아 소개한다.
1944년 7월 2차 세계대전이 노르망디 부근에서, 獨蘇(독소)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리턴 우즈에서 만나 戰後(전후)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할 기구의 설치를 논의하였다. IMF(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리턴 우즈 시스템의 두 설계자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미국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일벌레였다. 그는 디테일에 강했고, 정책을 논리적 구조로 정리하는 데 뛰어났다. 화이트는 케인즈와 자주 다투었다. 영국여왕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화이트는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정책을 건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제국의 쇠퇴기를 이용하여, 달러 중심의 戰後(전후)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는 영국에 敵對的(적대적)이었지만 소련엔 우호적이었다.
1944년 초 연합군은 독일을 점령한 뒤 발행할 화폐(마르크)를 미국이 인쇄한다는 데 합의한다. 소련은 ‘우리도 인쇄할 권리가 있다’면서 미국의 인쇄 동판을 사용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면 소련은 원하는 만큼 돈을 찍을 수 있게 된다. 미국 재부무의 造幣(조폐)담당 국장 알빈 홀은 반대하였으나 화이트는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소련을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 이 거래로 소련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는 소련의 전쟁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을 다른 동맹국과 똑 같이 믿어야 한다.”
모겐소 재무장관은 화이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예상한대로 소련은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마르크를 많이 찍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100억5000만 마르크를 찍은 데 대하여 소련은 780억 마르크를 찍었다. 화이트는 소련이 발행한 마르크를 미국이 소련에 유리한 고정 환률로 매입하였다. 지금 돈으로 소련은 약65억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전후 국제통화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브리튼 우즈 회의에서도 화이트는 다른 나라 대표들을 화나게 만들면서까지 소련에 유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의에서 소련이 브리톤 우즈 조약을 비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미국이 소련에 100억 달러의 저리 재건 차관(對英차관 제안액의 세 배)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를 이유로 IMF와 세계은행 창립 참여를 거부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이트를 IMF 총재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전 단계 조치로 1946년 1월23일 화이트를 미국을 대표하는 이사로 임명하였다. 2週(주) 뒤 FBI(미연방수사국) 국장 에드가 후버는 대통령에게 “화이트는 소련 지하 첩보 조직의 助力者(조력자)”라는 보고를 올렸다. 후버는 화이트가 “미국 정부 안에 소련 정보 조직을 심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상원은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화이트의 임명에 동의하였다. 트루먼은 잘못하면 정치적 스캔들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 화이트를 총재로 추천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미국인을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 자리 모두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IMF 총재 자리는 양보하였다.
루스벨트-트루먼 정부는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망에 대한 보고를 해도 묵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반공노선을 확실히 하였지만 그가 인수한 민주당 정부 안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찬동하여 참여한 공산주의자와 親蘇(친소)분자들이 많았다. 화이트에 대한 FBI의 內査(내사)만 있었을 뿐 공개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이트는 재무부와 IMF를 사직하고, 1948년의 진보당 대통령 후보 헨리 월레스 선거 운동을 도왔다. 親蘇的(친소적)인 월레스는 상무장관으로 트루먼 행정부에서 일했으나 對蘇(대소)강경 정책에 반대, 그만둔 뒤 출마한 것이다. 월레스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里程標(이정표)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념 지형상 ‘미국판 김대중’의 역할을 했는데 다른 점은 낙선했다는 사실이다. 월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화이트는 재무장관, 다른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국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챔버스)이 미 하원의 非미국인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冒頭(모두) 발언에서 그는 “나의 신조는 미국의 신조이다”면서 “나는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다”고 주장하였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화이트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폭로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僞證罪(위증죄)로 걸기 위하여 간첩 챔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이 곧 밝혀졌다.
다음 날 그는 뉴헴셔 주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던중 심장발작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위터커 챔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寫本(사본)을 제시한 것이다. 문서 原本(원본)은 챔버스가 보관하다가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챔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미 국무부와 재무부 관련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미국의 對日(대일)정책, 예컨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와 자산 동결 조치, 일본의 석유저장소와 군에 의한 방어 상황,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비밀 대화록 등등. ‘대통령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된 對日(대일)경제전쟁 계획은 재무부 이외엔 비밀에 붙여져 있다’는 화이트의 메모도 있었다.


‘브리튼 우즈의 전투’ 저자 벤 스틸은 화이트는 엘저 히스보다도 소련에 더 중요한 간첩이었다고 평했다. 화이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소련 첩보기관의 두더지(mole)' 역할을 하였다. 그는 소련에 미국 정책에 관련한 정보과 조언을 전달,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미국 정부 내에서 정책 협의를 할 때는 소련 편을 들었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완벽한 정책 협력자였다. 화이트는 일찍 죽는 바람에 기소를 면하였으나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첩보기관은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을 오고가는 외국기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 계획(Venona Project)을 실천에 옮긴다. 이 계획의 全貌(전모)는 冷戰(냉전)이 끝난 뒤 공개되었다. 미국이 소련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것은 1946년이었다. 이에 따라 보존된 과거의 통신자료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의 이름(암호명)이 등장하는 자료는 18건이고, 1944년 3월16일부터 1946년 1월8일까지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헌장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는 미국 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자로 위장한 소련 KGB(정보기관) 간부 블라디밀 프라브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프라브딘에 모스크바 본부로 보고한 電文(전문)을 해독해보니, 화이트는 “트루먼과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번 회의가 성공하도록 원한다.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주는 데 동의할 것이다”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화이트가 소련에 “지금 추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미국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준 사실, 화이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련 동조자를 미국 정부 내 관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문도 解讀(해독)되었다.
화이트를 변호하는 이들은 ‘프라브딘이 소련 첩보원인 줄 모르고, 즉 기자인 줄 알고 그런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냉전이 끝난 후 KGB 자료를 본 서방 학자들은 미국 정부 내의 다른 ‘소련 두더지’가 소련 첩보 기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화이트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이 그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베노나 계획이 해독한 암호엔 이런 내용도 있다.
<우리와 협력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는) 그의 아내가 어떤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나 비밀이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화이트가 건네주는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轉向하였던 챔버스는 1953년에 평하기를, “화이트는 미국의 對蘇(대소)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수립할 수 있는 완벽한 관료였다”고 했다.

‘브리턴 우즈의 전투’ 著者(저자) 벤 스틸은 왜 이런 엘리트가 ‘소련의 두더지’가 되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그는 <화이트 사건은 證人(증인)과 凶器(흉기)는 있는데, 범행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면서 동기를 추적하다가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장된 화이트 관련 자료뭉치에서 ‘노란 종이 위에 쓴 메모’를 찾아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때인 1944년에 쓴 것이다. 제목은 ‘미래의 정치-경제’였다. 저자는 이 자료가 知的(지적)
으로 야망에 불타던 사람의 사고방식과 열망을 알게 하는 창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메모를 보면 화이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從北(종북)좌파 분자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誤判(오판)을 연상시킨다.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모든 경우에 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경쟁과 자유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는 늘어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소련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현재 소련이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西歐(서구)가 소련을 惡魔(악마)로 그리는 것은 위선이라면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再侵(재침)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군사동맹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이런 구상에 대한 걸림돌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애국심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매우 강력한 가톨릭 위계 질서’,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동맹하면 자본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룹’이다. 화이트는 이런 反蘇的(반소적) 생각의 핵심은 경제이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이념의 원천이라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 벤 스틸은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전략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면서 화이트 메모의 결론을 소개하였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첫 번째 경우인데, 잘 돌아간다!>
著者(저자)는 화이트의 正體(정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戰後 세계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설계자는 소련의 행태를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소련이 미국의 중요한 友軍(우군)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소련의 대담한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한 탓이다.>


著者(저자)는 화이트는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격동의 1920, 30년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미국의 ‘소련사랑’(Russophile)' 세대의 작가나 관리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공황,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성의 붕괴를 목격한 이 세대는 혁명적인 정치 경제 질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이 혁명 뒤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파시즘과 맞서는 것을 보고, 나중엔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본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親蘇(친소)로 기울었다. 이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고 정부에 참여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소 분자들의 宿主 역할을 하였다. 그는 戰後 세계 질서가 美英이 아니라 美蘇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를 올려도 묵살하였다. 루스벨트도 화이트처럼 소련과 스탈린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이트는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진보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친소-좌경화되었다. 소련의 계회경제에 매혹되어 로렌스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 직후 소련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한 적도 있다. 재무부가 금융 개혁 부문에서 일할 것을 권유,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1934년부터 그는 다른 親蘇분자들과 함께 소련의 지하 공작망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었다. 엘리트 관료와 간첩질이란 二重(이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는 ‘미국판 386세대’인 셈이다. 광주사태와 민주화의 격동기에 친북좌경화한 세대가 오늘날 한국의 중추를 장악, 국가의 進路를 왼쪽으로 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대도 북한정권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著者(저자)는 화이트를 ‘그와 같은 開明(개명)된 관료집단이 미래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이런 이들은 정부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능력 이하라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의 노련한 공작원은 이런 심리를 간파, 화이트 같은 이들의 역할을 미화하여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수법도 썼다. 화이트는 소련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하는 간첩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 하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정리하여 주간, 격주간으로 전달책인 챔버스에게 건네주곤 하였다.
화이트 같은 자발적 간첩들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轉向(전향)한 소련 간첩(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誤導(오도)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동맹이다, 러시아는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 영국에 주는 것을 러시아엔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을 러시아에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 IMF와 유엔은 소련에 포섭된 두 미국인 간첩이 창립을 실무적으로 지휘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親蘇化(친소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소련과 간첩들이 2차 대전 때 미국과 소련이 동맹 관계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엘저 히스의 正體(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위터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중 당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소련으로 불려가 숙청될까 겁이 났다. 1938년 4월 그는 미국 공산당을 탈퇴하고 타임에 취직하였다. 그는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그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1939년8월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챔버스를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 리가 전향, 미국에서 활동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急死(급사)한 전임자 루스벨트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美蘇(미소) 관계도 악화되었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시작하였다.
1948년 8월3일 전향한 간첩 위터커 챔버스는 미 하원 非미국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면서 엘저 히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8월17일 캘리포니아 출신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 두 사람을 조사위원회로 불러 대질 신문하였다. 히스는 챔버스를 약간 아는 사이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남겼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 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조직을 위한 회담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 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내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일하도록 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提訴(제소)하였다.
1948년 11월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 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물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등 미국인 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육필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되었다. 챔버스는 이 문서들은 히스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하였다.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僞證罪(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時效(시효)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것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티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면서, ‘이것을 1937년 12월에 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월8일,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11월17일에 시작된 재판에서 검사는 히드 매싱이란 증인을 내세웠다. 매싱은 소련 간첩이던 시절에 히스가 자신의 조직에 들어 있던 노엘 필드라는 또 다른 국무부 간첩을 그의 조직원으로 데리고 가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두 번째 재판에서 히스는 유죄 선고를 받고 44개월간 복역한 뒤 1954년에 석방되었다.
히스 사건은 이게 1막이었다.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 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 판 드레퓨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은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미 의회 조사위원회과 법정 자료를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무고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두 책을 두고도 논쟁이 벌어졌다. 히스의 결벽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반증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世論(세론)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스추세츠 변호사회는 히스를 재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이 무렵 알렌 바인스타인이란 역사 연구가가 등장한다. 그는 히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챔버스와 히스를 잘 아는 80명을 인터뷰하였다. 히스도 동구와 이스라엘에 가서 전직 소련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히스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히스의 변론자료를 얻어 읽어보니 검사에 의한 증거 조작설을 부정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76년에 ‘위증’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히스를 틀림없는 소련간첩이라고 못 박았다. 이 책을 둘러싼 左右(좌우) 진영의 논쟁도 뜨거웠다. 바인스타인이 워낙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면밀한 구성의 책을 낸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좌파의 반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이후엔 히스 편을 드는 출판이 끊어졌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반공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히스 논쟁은 재연하였다. 히스가 선수를 쳤다. 그는 러시아 군사자료실의 책임자이고 평판이 높은 역사학자인 디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써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장군은 히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자료는 없으며 히스에 대한 비방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스는 좋아했으나 바인스타인과 다른 역사연구가들이 볼코고노프가 과연 제대로 자료를 검색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볼코고노프는 그해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의문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볼코고노프는 자신이 KGB 자료만 뒤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의 정보기관을 위하여 간첩질을 하였기 때문이다.
히스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헝가리 역사연구가는 노엘 필드(미국에서 東歐로 도망친 국무부 간첩)에 대한 헝가리 비밀경찰의 신문 조서에서 히스가 필드를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고 진술한 부분을 찾았다. 1996년 10월 미국의 CIA와 NSA(국가안보국)은 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1945년 3월30일자의 소련 암호 電文(전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위장명 알레스(Ales)는 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 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 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우스를 수행한 이가 엘저 히스였다. 히스의 正體(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1996년 11월24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CIA 국장 후보로 지명된 앤서니 레이크(전 대통령 안보 보좌관)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신은 히스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레이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나는 두 서너 개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스파이였을 것이라는 심증을 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었다. 그것이 확정적인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파가 레이크의 애매한 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 결국 그를 낙마시켰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민권운동 단체처럼 설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의 지도층이 자진하여 당을 소련의 하수기관으로 전락시켰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李承晩은 헌신적인 그의 법률고문 스태거스(John Staggers) 변호사와 오랜 친구인 「국제 뉴스 서비스(Internations News Servis)」의 발행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Jay Jerom Williams)를 대동했다. 李承晩은 쉽게 폭파할 수 있는 20여 개의 주요터널이 표시된 자세한 철도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질레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李承晩의 설명을 듣고 난 질레트는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미국정부에 요청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미국무부는 진주만 공격이 있은 뒤에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어떤 승인이나 지원은 일본을 자극하는 일이 되고, 그 때문에 도쿄(東京)에 있는 미국 외교관들의 안전한 귀국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쟁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있습니까?』

李承晩이 이렇게 반문하자 질레트는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나는 국무부의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22)

그러나 李承晩은 질레트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자신의 정적 한길수에게 깊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질레트는 1월6일에 헐 장관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류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질레트는 편지에서, 새로운 사태와 관련하여 미국의 육군과 해군에 더없이 귀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보원들이 일본에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거나 그들의 친지들이라고 했다. 질레트는 이어 한국 임시정부의 26개국 협정 가입운동이 계획되고 있고, 미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독립정부로 승인함으로써 한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조약에 가입하도록 하는 압력을 가할 것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이 육군과 해군의 정보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고 적었다. 현시점에서 한국 임시정부가 승인되거나 한국 임시정부의 연합국조약 가입이 발표되면 그들이 격노한 일본 정부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3) 질레트의 이러한 말은 곧 한길수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李承晩이 질레트 의원을 방문한 이튿날 윌리엄스와 스태거스는 국무부로 극동국 부국장 솔즈베리(Laurence E. Salisbury)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한국독립문제에 대한 국무부의 입장을 묻자 솔즈베리는 질레트 의원과 같은 대답을 했다. 윌리엄스가 일본에 대한 파괴활동을 착수하도록 한국인들을 격려하는 것은 그러한 활동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말하자 솔스베리는 그것은 주의깊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윌리엄스와 스태거스는 李承晩에 따르면, 현재 蔣介石 휘하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인은 4만 명이 넘는다고 말했다.24)


美國務部의 소련 스파이 앨저 히쓰

12월22일에 워싱턴을 방문한 처칠과 루스벨트의 전쟁협력 협의에 따라 1942년 1월1일에 발표된 연합국선언은 망명정부를 포함한 26개국이 서명한 역사적인 조약이었다. 李承晩은 헐 장관을 만나 한국 임시정부도 이 선언에 참가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월2일에 스태거스와 윌리엄스와 함께 국무부를 방문했다. 그러나 헐은 만날 수 없었고, 혼벡과 그의 보좌관 히쓰가 세 사람과 면담했다. 李承晩은 일본의 패전을 돕기 위해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자세히 설명하고, 한국 임시정부가 나치스 독일에 점령된 나라들의 망명정부와 마찬가지로 승인을 받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전략계획에 편입되면 적진 파괴와 게릴라 활동에 동원될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李承晩의 설명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이따금 미심쩍은 부분을 물어보기도 했다.

李承晩의 설명이 끝나자 히쓰는 李承晩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히쓰는 또 미국 정부는 李承晩이 실제로 얼마나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히쓰는 이처럼 당돌했다. 그는 서른일곱 살의 뉴딜러였다. 李承晩은 모멸감을 참고 전쟁이 끝난 뒤에 미국관리들이 관리하는 선거를 통하여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李承晩은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시베리아교역의 거점이 될 不凍港(부동항)을 한국에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여 점령하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쓰는 李承晩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미국의 중요한 한 전시동맹국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앉았을 수 없다고 했다. 히쓰는 한국에 관한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소련의 기본정책에 배치되는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李承晩과 두 미국인 친구는 크게 실망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李承晩은 미국의 정책이 이렇게 젊고 이렇게 세계정세에 미숙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국무부를 나왔다. 그러나 그는 히쓰가 소련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25) 그러나 히쓰는 이 무렵에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었음이 뒷날 밝혀졌다. 그는 기소되어 5년형의 유죄판결을 받고, 1953년 3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펜실베이니아주의 루이스버그 교도소에서 복역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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