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동아' 歷史교과서, 세 차례 '北核실험' 언급 없어

90년대 중반 발생한 대규모 北기아 사태의 원인은 자연재해(?)

지난 8월30일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두산동아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북한 문제를 소개하며 세 차례에 걸친 북한 核실험 문제 등 대량 파괴 무기(WMD) 실태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또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등 심각한 인권유린 실태에 대해서도 일체 기술하지 않았으며,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에 대해서는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 생산이 크게 줄어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도 늘어갔다”고 적시했다.

당시 대기근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김정일의 일인독재 暴政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 탓으로 돌린 것이다. 구체적인 교과서의 기술내용은 아래와 같다.

<1980년대 초부터 과다한 국방비 지출과 에너지-사회 간접 시설의 부족, 만성적인 외화난 등으로 경제 성장률이 점차 떨어지고, 북한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 생산이 크게 줄어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상황까지 발생하였고,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도 늘어갔다.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은 체제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건설현장에 투입하고, 합영법을 제정하여 외국 자본의 유치를 시도하는 등 ‘우리식 사회주의’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은 채 대외 개방과 시장 도입을 통한 변화를 모색하였다. 2002년에는 신의주 행정 특구, 개성 공업 지구, 금강산 관광 특구 등 대외 개방 지역을 확대하였다. 한편으로 북한의 핵 개발 시도, 장거리 미사일 개발, 북한 내부의 인권문제 등이 국제사회의 쟁점이 되었다>

[해설1] 북한 핵무기 개발사
 
강석주(姜錫柱)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2002년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
 
이어 2006년과 2009년 북한은 플루토늄을 사용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했다.
 
2010년 11월에는 미국의 핵(核)과학자인 헤커(Hecker) 박사를 초청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역사가 꽤 길고, 舊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북한은 핵물리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세워진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핵실험실이 있었다. 1964년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켜 ‘중국 핵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핵물리학자 왕감창(王淦昌) 등 중국의 주요 핵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다.
 
1956년 연구소의 설립 이후 1990년 북한과 러시아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후 1960년대부터 북한은 핵물리학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핵물리학원을 설립해 핵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 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핵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영변 핵시설에 사용한 핵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핵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북한의 초기 핵 연구는 도상록(都相錄), 한인석(韓仁錫), 이승기(李升基) 등 월북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1903~1990)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다.
 
한인석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현재 핵개발 핵심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 인력 3,000명,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9천여 명의 핵과학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핵물리학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핵물리학, 화학, 수학 등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외에도 평양고등물리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정말 핵무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핵무기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이다.
 
원자로 기술과 핵무기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핵분열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핵무기는 짧은 시간에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핵무기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핵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수기식 계산으로 개략적인 계산을 하여 설계했으나 특이한 문제점은 없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원자로를 설계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핵계산 코드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핵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으며,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을 가지고도 핵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대다수 핵(核)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핵개발은 김정일 정권이 각종 합의를 위반하면서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것을 요구하는 위협이다.

북한 핵실험 일지

북한의 첫번째 핵실험은 2006년 10월9일 오전에 실시됐다. 핵실험 규모는 TNT 1kt 규모로 실험장소인 함경북도 풍계리 인근에서 리히터 규모 3.6의 지진파가 감지됐다. 1차 핵실험은 핵무기 실험이 아닌 핵장치 실험으로 규정됐다. 플루토늄 원자핵분열을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라 원자 분열을 촉발시킬 재래식 고폭탄을 폭발시킨 것으로 분석됐다.

2차 핵실험은 김정일 건강 악화설이 나돌던 2009년 5월 25일 실시됐다. 규모도 4kt으로 확대됐고, 플루토늄 원자핵분열을 직접 일으킨 핵무기 실험으로 진행됐다. 당시 측정된 지진파는 1차 핵실험보다 강한 리히터 규모 4.5로, 핵실험 능력이 발전했음을 내보였다.

2013년 2월12일 실시된 3차 핵실험의 경우 기존의 핵실험 과정을 그대로 답습했다. 당시 핵실험은 항상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함께 실시됐다.

북한은 2006년 7월5일 있었던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 발사 석 달 만에 1차 핵실험을 했고, 2009년 4월 5일 광명성-2호를 발사한 다음달에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3차 핵실험 역시 2012년 12월12일 장거리 미사일로 규정된 은하-3호를 발사한 뒤 이뤄졌다.

기사본문 이미지


[해설2] 교과서가 다루지 않은 北인권 실태

<조갑제닷컴 발간,《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거짓과 왜곡 바로잡기》, 351페이지 인용)

1. 북한 인권문제: 1990년대 심각한 식량난으로 많은 북한 주민들이 아사하면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96년~1997년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재중 탈북자는 20~30만 명에 달했다. 북한 당국은 검거된 탈북자를 심하게 고문하고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는 등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 이후로도 낙후되고 억압적인 독재 체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이들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으로 탈출한 여성 탈북자의 경우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인신매매범들은 북한이나 중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의 처지를 악용하고 있어 심각한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다. 탈북자들은 치외법권 지역인 중국 주재 외교공관에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동남아시아 및 몽골 등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2. 북한 정치범수용소: 북한은 ‘정치적 죄’를 범한 자와 그 가족을 사회와 격리시켜 가혹하게 처벌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관리소, 완전통제구역, 닫힌 구역, ‘OOOO부대’ 등으로 불린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대 후반 남한을 도운 치안대나 적대계급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1970년대부터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반대파를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공포정치로 사회를 통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소가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쇄 및 통합 과정을 거쳐 현재는 6곳이 운영 중이며, 약 20만 명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용소는 수감되면 출소할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일정기간 동안 강제노동을 한 후 수형 기간이 끝나면 석방되는 혁명화 구역(15호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 18호 북창수용소)으로 구분된다. 죄명은 정치적 발언, 탈북과 한국행, 反정부 행위, 김일성 父子에 대한 비판 등이다. 당사자 외 대부분의 수감자는 수감 사유와 죄명을 알지 못한 채 부모, 조부모, 친적의 잘못 때문에 수감된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아래는 대북인권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윤현)이 최근 공개한 북한고문실태보고서(제목: 고문의 공화국, 北)를 요약한 것이다. <주>


▲비둘기 고문= 양 팔을 뒤로 꺾어 난방관(스팀관)이나 쇠창살에 수쇄(수갑)을 채워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고문으로 지하 감방에서 흔히 사용된다. 하루만 지나면 어깨 근육이 굳고 가슴뼈가 새가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경우에 따라 양 팔 뿐만 아니라 양 다리까지 사방으로 묶어 공중에 매달기도 하는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몇 배로 느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없던 죄도 시인하고,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요구하는 대로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잠도 재우지 않으며, 오랫동안 묶여 있으며 몽둥이로 계속 구타를 당하기 때문에 점점 감각이 없어져 전신근육이 마비되지만 화장실도 안보내주니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똥오줌은 그냥 바지에 질질 쌀 수 밖에 없다.

간수도 없고, 가둬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하 감방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도 지상 감방에서는 들리지 않아 일반 탈북민들은 알지도 못한다.

▲신문보기= 의자 없이 신문 보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10분도 못 버틴다. 그러면 철창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손을 철창 안으로 집어넣어 머리채를 잡아채 바깥으로 잡아당긴다. 그러면 머리가 철창에 세게 부딪혀 이마에 피가 흐른다.

▲종아리 뒤쪽 굵은 나무 끼워 무릎 꿇고 앉기= 굵은 나무 각자(몽둥이)를 종아리 뒤쪽에 끼우고 방열판 위에 무릎 꿇고 앉힌 상태에서 구타한다.

▲수갑을 채워놓고 몽둥이, 부삽, 불갈구리 등으로 구타= 조사실 안에 있는 온수관(난방관, 스팀관)에 수쇄(수갑)을 채워 묶어 피하거나 도망가지 못하게 해놓고 구둣발로 차고 각자(5cm×5cm 굵기 나무몽둥이)로 머리, 다리, 몸 어디든 사정없이 내려친다. 몽둥이 뿐 아니라 부삽, 불갈구리 등 눈앞에 보이는 흉기는 무엇이든지 사용한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기 때문에 허리와 등뼈가 많이 상한다. 맞고 나면 온몸에 쥐가 나고 통증이 심하게 온다. 이 고문을 심하게 당한 뒤 제때 치료받지 못해 수년이 지나도 척추 및 신경계에 장애가 남은 사람들이 많다.

▲벽이나 변기에 머리 찧기= 간수들이 주는 벌로 머리를 벽에 들이받게 시킨다. 소리가 크게 나도록 받으라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쿵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찧으면 이마에 피가 터진다. 화장실로 끌고 가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찧게 하기도 한다. 피가 퍽퍽 터져 이내 피범벅이 되고, 정신을 잃기도 한다.

▲재떨이 까기= 조사실에는 조사관들이 쓰는 재떨이가 항상 있다.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아 조사관은 문건을 전부 손으로 작성해야 하는데, 조사 중 거짓말을 하거나 죄를 부인해 앞뒤가 맞지 않으면 종이를 찢고 다시 써야 한다. 그럴 때는 조사관이 화가 나서 직접 재떨이로 머리를 내려친다.

▲무릎 꿇고 숙인 얼굴을 걷어차기= 감옥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자세로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간수가 군화로 얼굴을 두 번 걷어차 코피가 터지기도 한다. 머리를 푹 숙이고 코피를 흘리며 아파하고 있으면, 이번에는 허락도 없이 머리를 숙였다며 머리 뒷골(후두부)을 구둣발로 밟아 바닥에 짓눌려 입술이 터진다.

▲단체로 앉았다 일어서기 반복(집단 뽐뿌질)= 한 사람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감방 전체에 단체벌을 주기도 한다. 영양실조에 걸려 100번만 해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뽐뿌질을 700번씩 시키기도 한다. 감방 집단 체벌이다 보니 버티기 더 힘들어진다.

▲여러 명이 번갈아가며 구타= 다른 보위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저녁 때부터 자정까지 조사하여 몇 사람이 교대로 들어가 구타한다.

여러 사람에 번갈아가며 구타당할 경우 한 사람에게 고정적으로 구타당할 때보다 공포감이 더 크다. 앞서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에 대해서 다른 고문관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강도 높은 구타를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구나무 선채로 구타하기= 물구나무를 세운 채로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친다.

▲손가락 사이에 연필 끼워 누르기=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누른다


<조갑제닷컴> 컨텐츠의 외부 게재시 제목과 내용을 수정하지 마십시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