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동아 歷史교과서, 5.18 광주사태 관련 '계엄군만 집중비판'

광주사태 "反美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지난 8월30일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두산동아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광주 5.18민주화 운동(광주사태)를 기술하면서 당시 戒嚴軍(계엄군)에 대한 '일방적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1980년 봄부터 민주화 열기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5월17일 신군부는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였다. 하지만 광주 지역 학생들은 5월18일에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 헌정 체제의 회복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무장하고 계엄에 맞섰다. 그러나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5.18민주화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두산동아의 歷史교과서는 광주사태와 관련된 검찰조사(1995년)와 광주청문회(1988년)를 통해 밝혀진 당시 계엄군의 발포 명령자가 없었던 점, 그리고 소위 시민군에 의해 발생한 국군의 인명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두산동아 歷史교과서는 ‘우리는 왜 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소제목과 함께 ‘광주시민 궐기문(1980년 5월25일)’을 게재해 당시 사건과 관련해 시민군 측의 주장을 여과없이 소개했다.

<우리는 왜 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었습니다...(중략)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중략)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광주 시민군 궐기문(1980년 5월25일)->

이외에도 두산동아의 歷史교과서는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의 병력 동원에 미국이 방조했다는 판단에서 反美(반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고 기술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광주사태 발생 당시 미국은 비상계엄 2시간 전에 신군부로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았다.

글라이스틴 주한 美대사는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5월18일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해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는 ‘충격적이고 경악할 일’이라는 미국 측의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또한 계엄사령부가 광주사태 당시 동원한 특전사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 및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韓美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됐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이유는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이 韓美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을 대비한다는 한국 측의 요청에 따라 10월27일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韓美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한편, 글라이스틴 대사와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는 5월23일 첫 회동을 가졌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 측에 5월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이 이런데도 두산동아 歷史교과서는 광주사태 당시 미국의 방조로 “反美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참고자료1]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합동수사 보고서
1980년 5월20일 계엄군을 겨냥한 시민군의 차량 공격  

▲5월20일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 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결의했다. 18시경 무등 경기장에 1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였다.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톤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이었음)

▲광주역 앞에서 공수 3여단 12-15대대는 5월20일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崔世昌 3공수여단장은 22시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 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이하 생략) (注: 실탄을 갖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21일까지는 차량, 휘발유, 투석 공격에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

▲5월21일 13시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중략)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송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 무장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정, M1소총 200여정, 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 
 
15시35분경 화순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만7760발, 화산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000여 발을 탈취했다.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산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 화약고, 한국화약, 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 M1, LMG 등 총기 4900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폭약)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組(조)를 編成(편성)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 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市民軍(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략)

[참고자료2] 시민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공수부대원

▲광주사태 진압작전 지휘관 安富雄(안부웅) 대령의 증언

“우리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거기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注: 광주 진압 직후 국방부 자체 조사에 따르면 5월21일 새벽 3시30분에 광주세무서에서 카빈 17정과, 아침 8시에 20사단에서 M16 4정이 탈취 당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경기만)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 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 측의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았다.” (출처: 조갑제닷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잊혀진 광주사태 '순직 군경(軍警) 27인' 명단
국가보훈처 관계자 “유가족에게 매달 111만 8천원~126만 7천원 지급”
(2013년 6월11일자 조갑제닷컴 보도)

광주사태(5.18광주 민주화 운동)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殉職(순직)한 군인과 경찰은 총 27명이다. 군인이 23명(장교 2명, 사병21명), 경찰이 4명(경장 3명, 경사 1명)이다.

당시 이들 軍警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무장한 민간인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조갑제닷컴>은 이들 순직 軍警에 대한 사후 처리가 어떻게 됐는지 1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에 문의했다. 익명을 요구한 보훈처 관계자는 “고인(故人)들의 경우 공무 수행 중 순직한 軍警으로 판정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고 밝혔다.

유족들에게 제대로 보상이 이뤄졌는지에 대해 묻자 “매달 최저 111만 8천원~최고 126만 7천원의 금액이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자녀들의 경우 취직 및 대학 입학 시에 여러 혜택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광주사태 희생자(시민)의 경우 1인당 최고 보상액이 1억3천만 원(1991년 5월 기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등일보> 2011년 5월4일자는, 1990년 관련법 제정 이후 5252명이 5.18 관련자로 인정 받았고, 총2357억원의 보상이 이뤄졌다고 보도하였다. 대상은 사망-부상자, 연행구금자, 행불자 등이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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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광주사태 당시 순직한 軍警(군경) 27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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