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동아 歷史교과서, 1963년 大選을 '부정선거'로 규정

제5대 대선은 개표가 완료되기 전에는 좀처럼 그 결과를 장당하기 어려운 ‘박빙의 승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산동아 역사교과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선거 과정과 개표 막판에 부정’이 있었던 선거는 아니었다.

지난 8월30일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두산동아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294페이지 <역사 속 인물>란에서 1963년 실시된 제5대 大選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로 규정했다.

<쿠데타 세력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무력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 이를 회복하는 방법은 합법적인 선거로 집권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개표 초반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판세가 뒤집혀 박정희가 15만여 표 차이로 이겼다. 윤보선은 패배를 인정치 않고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 선거 과정과 개표 막판 부정이 없었다면 자신이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당시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민정당의 윤보선,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등이 출마했다.

총유권자 수는 1298만 5015명으로 이 가운데 1103만 6175명(투표율 85%)이 투표에 참가해 박정희 후보가 470만 2640표(득표율 46.6%)를 얻어 454만 6614표(득표율 45.1%)를 얻은 윤보선 후보를 이기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윤보선 후보의 패인은 야권 후보의 난립에 있었다.

6개 정당에서 6명의 후보가 입후보한 가운데, 민정당 후보 윤보선과 국민의당 후보 허정은 야권통합과 단일후보를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채 각각 입후보했다. 송요찬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박정희 후보의 軍선배였지만 오히려 박정희의 민정참여와 민주공화당 창당 등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장면이 정치활동 규제상태에 있자 제2공화국에 집권했던 민주당 신파를 계승한 민주당은 당초부터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윤보선에 적극 지지입장도 아니었다.

윤보선 후보는 또 당시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사상논쟁’을 제기했다.

그는 박정희 후보가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 군부 내의 左翼 숙청 과정에서 옷을 벗었던 전력이 있음을 들어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박정희 후보는 ‘舊정치인’ 들의 사대주의적인 정치 행태와 서구 맹종적 민주주의를 공격했다. 

기사본문 이미지


당시 학생 및 지식층은 군부가 내세우는 민족주의적 태도에 대해 동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신문들은 대개 “그만하면 괜찮았다”는 식으로 대선을 평가했고, 美 대사관과 국무성도 “민주적인 선거가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고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역시 선거가 “조직적이고 질서 있게” 치러졌다고 평가했다(인용: 김광동 外 공저,《한국 현대사 이해》, 2007년, 경덕출판사). 

이처럼 제5대 대선은 개표가 완료되기 전에는 좀처럼 그 결과를 장당하기 어려운 ‘박빙의 승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산동아 역사교과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선거 과정과 개표 막판에 부정’이 있었던 선거는 아니었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