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케넌의 냉전 승리 大전략

「작은 나라가 독재를 하든 굶어 죽든 그것이 自國(미국)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개입할 필요가 없다」
[기고] 조지 케넌의 사상과 對한반도 전략 (월간조선 2005년 5월호)

「미국의 死活的 이익이 없는 한반도에 군사 개입하지 마라」



케넌은 「작은 나라가 독재를 하든 굶어 죽든 그것이 自國(미국)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對소련 봉쇄정책을 입안했고, 그 결과 소련이 붕괴하는 걸 지켜본 행운아였다.

李春根
1952년 서울 출생. 연세大 정외과·同 대학원 졸업. 美 텍사스 주립大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역임. 現 자유기업원 부원장.

자신이 입안한 정책의 끝을 확인



지난 3월17일 조지 케넌이 세상을 떠났다. 1904년 2월16일생이니, 天壽(천수)를 누릴 만큼 누렸다.

케넌은 冷戰(냉전)시대 미국의 大戰略이었던 對소련 봉쇄정책을 구상했던 외교관이자, 국제정치학의 大家였다. 그는 자신이 기획했던 아이디어가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채택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고, 자신이 수립한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소련이 붕괴되는 현상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위스콘신州의 밀워키市에서 태어난 그는 1925년 프린스턴 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美 국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으로서의 인생을 시작, 스위스·독일·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등지에서 근무했다.

케넌은 1929년 베를린에서 역사·정치·러시아語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러시아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때 케넌은 러시아語·독일語·프랑스語·폴란드語·체코語·포르투갈語와 노르웨이語를 마스터했다고 한다.

1933년 미국과 소련 사이에 국교가 수립됐다. 조지 케넌은 3등 서기관으로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창설에 참여한다. 케넌은 1937년까지 소련에서 근무했다.

당시 미국 외교관들은 미국이 소련과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은 별로 없다고 믿었다. 케넌이 인식하고 있었던 소련 체제의 대내외적 권력관계의 動學(power dynamics)도 스탈린의 피의 숙청 과정을 관찰한 충격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케넌은 1944년 5월부터 1946년 4월까지 다시 소련에서 근무했다.

1946년 2월 케넌은 소련 주재 미국 대리 대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당시 東유럽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주의의 저지를 호소하는 유명한 「長文의 電報(전보)」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전보를 통해 인정을 받게 된 케넌은 1947년 4월 국무부에 신설된 정책기획실의 실장을 맡았다. 정책기획실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마셜 플랜 立案에 참여했다.

1947년 7월 케넌은 「Mr. X」라는 필명으로 「포린 어페어즈」誌에 「소련 행동의 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1947년 3월12일 발표된, 고립주의로부터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을 천명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정당화시키는 논문이었다.

1949년 국무장관 고문이 된 케넌은 1950년 8월 휴가를 얻어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에서 미국 외교사 연구에 몰두했다. 여기서 케넌은 유명한 소책자 「미국외교 1900~1950」를 저술했다.

케넌은 1951년 12월부터 1953년까지 駐蘇 대사를 지냈다. 이후 그는 駐유고슬라비아 대사(1961~1963)를 지낸 외에는 줄곧 프린스턴大 고등학술연구원에서 연구 및 저작 생활을 했다. 1956년부터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원 교수를 지냈고, 1974년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케넌은 회고록 두 권을 포함, 17권의 저서와 수십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1931년 결혼한 아네리스와의 사이에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봉쇄정책의 기반이 된 8000字의 電報

「유럽과 아시아에 강력한 패권국이 등장하는 것을 저지한다」

이것은 미국 외교의 흔들리지 않는 大전략이다. 冷戰시대 미국의 전략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이 되려는 소련을 제어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戰後의 세계가 소련과의 치열한 갈등으로 얼룩지게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소련과 더불어 세계 평화를 쉽게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 무렵 소련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조지 케넌이었다.

1946년 소련 주재 대리 대사로 있었던 케넌은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 앞으로 8000字가 넘는 長文의 電報를 보냈다. 이 電報는 冷戰시대 미국의 大전략인 「봉쇄정책」을 형성케 하는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국무부와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공식적인 의사전달 통로인 電報는 통상 짧은 글로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케넌은 미국의 對소련 인식은 물론 冷戰시대 미국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긴 논문을 電報 형식으로 미국 국무부로 電送(전송)했던 것이다.

이 電報에서 케넌은 『크레믈린이 인식하는 신경질적인 세계관의 근저에는 러시아인들이 전통적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공산 혁명 이후 이 같은 불안감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동방적인 비밀주의 및 음모」 등과 혼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케넌은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소련의 행태는 주로 스탈린 정권의 국내 정치적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며,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적대적인 세계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행동의 근원을 가진 소련에 대처하기 위해 케넌이 제시한 대안은 『西方진영의 정치 및 경제 제도를 강화시킴으로써 소련이 도전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소련 체제가 궁극적으로 부드러운 체제가 되는 것을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1947년 「Mr. X」라는 익명으로 발표된 케넌의 논문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에 대해 좀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소련 행동의 연원」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결합으로서 외부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파멸시키겠다는 혁명적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스탈린이 사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포위」라는 개념은 소련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對蘇봉쇄를 일방적으로 혼자 힘으로 해야』

케넌은 『스탈린이 西方의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소련을 향한 미국의 정책은 장기적인 것이며, 인내심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인들의 팽창주의적 경향을 경각심을 가지고 봉쇄하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西方진영의 자유주의 제도에 대한 소련의 압력은 『소련정책의 변화 및 전술을 반영하며 계속 변화하는 지리적·정치적 관점에 의거한 재치 있고 경각심 있는 카운터 포스를 통해 봉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케넌의 논문은 더 나아가 『미국은 이 같은 對소련 봉쇄정책을 혼자의 힘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수행하는 동안 미국은 경제적인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 소련의 정당정치 구조는 주기적으로 극심한 긴장에 시달리게 될 것이며, 소련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해체되어 버리든지 혹은 부드러워지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케넌의 X 논문이 발표된 직후 미국 내에서는 冷戰시대의 외교정책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大논쟁이 야기되었다.

월터 리프먼 등은 X 논문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얼마 후 Mr. X가 美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인 케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케넌의 「長文의 電報」와 논문 「소련 행동의 연원」은 미국의 對蘇정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우호적인 정책에서 적대적·봉쇄적인 입장으로 바뀌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국의 고립주의적 전통을 개입정책으로 바꾸는 계기도 되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對蘇 봉쇄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한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미국은 소련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 방방곡곡의 거의 모든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한국전쟁은 트루먼 행정부가 케넌의 對蘇 봉쇄정책을 확인하는 첫 번째 시금석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소련 세력의 확장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마찬가지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미국은 베트남전에 개입했지만, 한국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봉쇄하기 위해 이슬람 반군들을 지원했고, 결국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케넌이 1947년 예측했던 「소련의 해체」와 「冷戰의 종식」이 이루어졌다.


6·25 때는 UN軍의 北進 반대

일반인들은 물론 국제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현실주의자들은 무력의 사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국제정치란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합을 벌이는 터」이며 국제정치의 결과를 규정하는 것은 「국가들의 힘」이라고 믿는다는 것이지 국가들은 自國의 이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무력에 더 쉽게 호소한다. 그들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변화에 대해 현실주의자들보다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화당보다 이상주의적인 민주당이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을 때 미국이 더 많은 전쟁에 개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베트남전 및 이번 이라크 전쟁을 앞서서 반대한 사람들이 각각 당시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인 한스 모겐소 교수와 존 미어셰이머 교수라는 사실은 그 좋은 증거다.

현실주의자·국제정치학자였던 케넌도 트루먼 이래 미국의 외교정책이 현실주의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케넌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미국의 對蘇정책이 너무나 군사적인 측면에 치우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X논문에서 미국이 채택해야 할 정책 대안을 좀더 분명하게 밝히지 못했다는 사실을 후회했다.

애치슨 장관이 국무장관으로 부임한 이후 미국의 對蘇정책은 특히 군사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케넌은 냉전시대 미국의 군사전략의 지침이었던 「NSC-68」은 그 초안조차 만들어지지 말아야 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NSC-68」은 미국의 정책을 너무 경직화·단순화·군사화시켰다는 것이다.

케넌은 수소폭탄의 개발에 반대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국무부內에서 38선을 넘어 北으로 진격한다는 루머가 나돌자 그는 한국을 무력으로 통일시키자는 입장이었던 당시 극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와 격론을 벌였다. 케넌은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北進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같은 논쟁은 국무부 내에서 케넌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드는 원인이 되었다. 애치슨 장관은 케넌의 조언에 더 이상 의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애치슨 장관은 1950년 정책기획실장을 폴 니츠로 교체했다.

케넌은 1951년 12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소련 대사로 임명됐다. 이듬해 9월 말 그는 『모스크바의 미국대사관에서의 생활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베를린에서의 생활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소련은 『케넌이 소련을 나치 독일에 비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非우호적 인물」로 선언했다. 이 일로 케넌은 駐蘇 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 아이젠하워 정부의 매派 국무장관인 덜레스와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케넌을 자문위원회의 座長(좌장)으로 대접했지만 케넌의 견해는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은 死活的 지역 아니다

프린스턴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케넌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비판의 핵심은 미국 외교정책의 논리가 너무도 이상주의적인 기대심에 의존하고 있으며, 외교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려 하며, 스스로 옳다는 믿음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케넌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이상주의적 경향을 띠는 이유를 미국 정치체제의 민주주의적 본질에서 찾았다. 케넌은 민주국가의 국민들은 원초적인 수준의 슬로건과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외교정책만을 지지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군사개입을 마지못해 지지했던 케넌은 베트남전에는 반대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이 미국의 死活的인 이익이 걸려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케넌의 논리는 물론 한국에도 적용된다. 미국의 死活的인 이익이 걸려 있지 않은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케넌은 미국의 死活的인 이익이 걸려 있는 지역은 소련·영국·독일·일본, 그리고 北아메리카 등 다섯 지역뿐이라고 보았다.

케넌이 주장한 봉쇄정책은, 사실은 이 다섯 지역에 한정 되는 소위 「거점봉쇄」였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지구적 차원의 봉쇄」 전략을 택했다.

케넌은 지구적 봉쇄는 미국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제3세계 분쟁에 개입하도록 했고, 소련과 군비경쟁을 벌이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사실 冷戰시대의 미국의 한국 방위는 케넌의 봉쇄정책이 그가 원한 바 대로 적용되지 않은 결과다. 케넌은 자신이 말했던 봉쇄는 정치적인 것이었지, 군사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후 저술한 글들에서 계속 강조했다.

케넌의 이 같은 주장은 보수주의 학자들과 수정주의 학자들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케넌은 본질적으로 반공주의자였다』면서, 『케넌의 주장으로 인해 미국은 세력균형보다는 覇權(패권)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케넌과 같은 진정한 현실주의자들은 국제정치에서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가 독재를 하든 굶어 죽든 그것이 自國(미국)의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케넌의 글들을 읽어 보는 일은 요즈음 한국에 만연되고 있는 이상주의 국제정치관의 문제점을 짚어 내는 데도 아주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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