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글은 혹세무민이 될 수도

좋은 글은 私와 邪를 뺀 맑은 마음에서 나온다.
名文의 세 가지 조건

名文 중의 名文이라는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고 한 마디로 단언했지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물론이고 남의 글을 읽는 첫째 목적도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겠다. ‘새로운 것’하면 으레 지식과 정보를 생각하겠으되, 남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록과 상상의 문학도 포함된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旅路의 삶과 가지지 못한 사상과 미치지 못한 상상과 지식이 생생하게 어우러진 내용의 글을 읽는 것은 곧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구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 경험과 졸렬한 상상력은 언젠가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낭패하게 만들고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과 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정직하고 솔직한 글은 우선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실성인 것이다. 하늘 아래 완벽한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솔직한 사람은 겸허하고 당당한 글을 쓴다. 孔子(공자)가 詩經(시경)의 詩 300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한 “생각(하는 마음)이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를 詩를 쓰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면, 나의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지금 名文으로 대접받고 있는 글들 중에서 위선적 감정 과잉의 우국충정과 殉愛譜(순애보)의 글들은 없는가?

새롭고 확고한 지식과 진실한 심정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어휘가 부정확하고 문장이 번잡하고 단락이 불명확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이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확한 어휘를 쓰는 것(正名)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의 正體性(정체성)과 관련된다. 좋은 음식 재료도 熟手(숙수)의 솜
씨와 깨끗하고 반듯한 그릇이 있을 때에야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춘 글이 가지런하게 마름질되었을 때, 곧 스스로 질서와 체계를 만들며 경제적으로 정리되었을 때, 나는 일단 名文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고 까닭 없이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은 非경제적인 글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는 즐거움

‘어문일치’의 뜻을 오해하고 글은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으로 물 흐르듯이 써야 한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말과 글이 일치할 수 있을까? 글은 눈으로 들어오는 ‘그림’이고 말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이다. 쉬운 어휘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사람마다 지식과 사고와 경험의 수준이 저마다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물 흐르는 듯한’ 쉬운 문장이라고 하되, 드넓은 천리 長江(장강)도 다양하고 무수한 細流(세류)들이 한데에 합수한 것이고 산을 만나면 휘어져야 하고 큰 비가 지나간 뒤에는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더구나 수심이 깊을수록 물밑에는 사공이 예상하지 못한 암초가 있을 수 있다. 관개수로식 문장이야말로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이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민중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愚衆(우중)을 생산하는 惑世誣民(혹세무민)의 주장이 되기 쉽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들과 지식들이 간혹 나타나서 사전을 찾는 글 읽기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작은 어려움이고 지식의 창고를 채워 주는 작은 노고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람도 이제 없으며, 그렇게 책 읽기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사전의 부피는 문화의 변천과 문명의 발전에 비례한다.
또하나 덧붙이고 싶은 나의 주장은 준말의 무분별한 사용이 글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꼭 필요한 주어의 생략이나 탈락이, 그리고 시제의 불일치가 불필요하게 시선을 행간에서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글읽기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경고 만큼 새삼 경청해야 할 완벽한 경고도 없을 것 같다. 글의 경우, 완벽의 추구가 감동의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詩로서는 발상이 별로 비범하지 못하고 구문이 상당히 길고 또한 번거롭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님의 침묵’이 겸허하게 인도하는, 알 수 없는 초절의 길을 순간적이나마 나를 ‘차마 떨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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